코로나19로 '삶의 이중성'을 본다
진부한 반복이지만 존재의 양면성
감추임과 드러남통해 의미 일깨워
자본 민낯·경쟁 이웃 이젠 벗어날때
새로움을 성찰 현실화하는 결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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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일상은 매우 이중적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전도서'의 말처럼 일상은 늘 그렇게 되풀이되는 진부함이기도 하지만, 밤이 되면 어두움 속에서 그 진부함에 가려 보지 못하던 것들이 새롭게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든 아니면 그 고마움이든 반복되는 일상에서 빛이 사라진 세상은 놀랍게도,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사실을 다시금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되풀이 되는 일상이 진부함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삶과 존재가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의 반복임을 알게 된다. 일상은 진부함과 지겨움의 시간이지만, 다른 한편 놀라움과 새로움의 자리이기도 하다. 일상은 삶의 이중성과 존재의 양면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는 감추임과 드러남을 통해 그 숨겨진 의미를 알려준다고 말한다. 존재는 그런 순간을 간직한 사건 자체다.

코로나19로 인해 이 일상의 이중성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일상성을 살면서 우리는 일상의 고마움과 아름다움, 그 의미를 새롭게 보게 된다. 일상의 진부함이 사실은 우리 삶의 전부임을, 그 진부함 안에서 순간순간의 새로움과 고마움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임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는 위기이지만,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는 갈라진 길 위에 선 선택의 순간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선택의 시간은 우리 삶 전체가 걸린 절대적 순간이다. 깨어진 일상에서 진부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다시금 우리 삶과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진부한 일상 속의 새로움을, 경쟁상대로만 보던 이웃의 고마움을, 성장과 풍요를 말하던 자본의 민낯을 새롭게 보게 된다. 공론장과 정론을 말하던 주류 언론이 당파적 이익에 빠져 얼마나 왜곡과 무지와 선동을 일삼는지를,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의 화려함이 어떻게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과 평범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가려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삶의 고통과 고난을 구원의 말씀이 지닌 화려함으로 가려온 교회,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경제적 현실을 무한성장의 풍요로 가려온 자본, 자기 이익을 위한 법과 언론이 포장한 정의가 얼마나 화려한 위선인지를, 전문지식과 학력이란 꽃으로 성공을 약속하던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데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남김없이 보게 만든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이 진부함과 거짓을 벗고 새로움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 사회와 삶을, 우리 일상을 새롭게 만드는 길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때만이 가능하다. 자연과 다른 생명이 자본과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을 때 근대 세계의 화려함을 넘어, 가려진 존재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과학·기술의 능력이 자본에 종속된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 현대 세계의 물질적 성공에 가려 잊어왔던 인간다움의 근원을 새롭게 밝혀야 한다.

마침 다음 주면 매우 부족하지만 우리의 선택을 보여줄 기회가 온다. 언제나 둘 중 하나만 강요했던 정치의 진부함을 벗어날 기회다. 미래를 말하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퇴행하는 미래 없는 정당, '더불어'를 외치지만 결국 나만 살자는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 거짓과 위선이 약속하는 화려함을 깨는 것은 어두운 위기의 순간에서야 가능하다. 이 순간의 결단은 과거의 경로를 벗어날 때 현실이 된다. 언론의 무능과 왜곡을 알면서도 여전히 주류 언론을 신봉하는 맹목, 명문대학을 가야만 성공한다는 상상력의 한계, 신을 파는 교회가 실존적 구원을 보장하리란 허상, 기존 사법제도에 매몰된 법이 정의를 지켜줄 것 같은 착각을 벗어나는 길은 진부한 일상을 결단의 순간으로 바꿀 때만 가능하다. 삶은 이런 결단을 위한 지성적 성찰과 실천을 매 순간 되풀이 하는 과정 자체다.

코로나19 이후 새로움 속에서 삶과 인간관계, 정치와 경제를 상상한다면 그 새로움은 진부함을 깨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새로움을 현실화하자, 삶의 퇴행적 경로를 깨고 새로운 일상을 그리자. 해체 없이 새로운 존재의 집은 있을 수 없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