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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살 먹은 딸아이가 떠드는 말
"억지로 없애면 혈소판 또 죽어요"
26년전 다리 붕괴·세월호 6주기
기억과 선거前 터져나오는 막말
미안함은 커녕 생채기 또 헤집어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혼자 쓰던 하숙집 내 방에 중고 텔레비전 한 대를 들여놨었고, 계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 그날 아침, 창문을 열자 꽤나 쌀쌀한 날씨에 놀라 도톰한 겉옷을 옷장에서 꺼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왜 맨날 아침을 거르냐며 소리를 빽 질렀지만 나는 숭숭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범벅한 샐러드가 지겨워 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날 팔을 꿰고 단추를 여미던 그 코트의 색깔까지 선명한 이유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26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게 어찌 떠오를까. 마지막 단추를 여밀 때 낡은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던 그 뉴스. 다리가 무너졌다니. 버스에 타고 있던 여고생들이 우르르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니. 내 방을 광광 울렸던 뉴스는 하숙집 거실 텔레비전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하숙집 아주머니는 밥을 빨리들 먹으라며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멍하니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던 누군가의 숟가락에서 된장국 국물이 흘렀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던 누군가는 후들, 다리를 떨었다. 맛도 없는 양배추샐러드 양푼을 들고 하숙생들의 접시에 더 덜어주려던 아주머니도, 손을 들어 입을 막은 옆방 1학년 여자아이도 그 거대한 침묵에 섞인 하나의 정물로만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옆방 1학년 여자아이가 무학여고 졸업생이었다. 그날 숨진 무학여고 학생만 여덟이었다.

우리는 사람이라서, 슬픔을 오래 기억한다. 지금이야 이십대가 기절할 만큼 힘든 시기라지만 26년 전, 그때만 해도 스무 살은 자유와 해방을 뜻했다. 지겨운 모의고사와 내신에서 벗어나 마음껏 놀 수 있는 나이. 학사경고쯤 받으면 어때. 그런 것쯤 인생의 허물도 아니던 1990년대. 그런데 그런 일도 채 겪기 전에 검은 강물로 낙하했을 어린 청춘들과 어느 집의 아버지, 어느 집의 어머니, 누군가의 소중한 누군가들이 한순간 사라져버린 그 슬픔을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더불어 남겨진 이들의 애끊는 슬픔까지도 우리는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잊기도 한다. 그날 사고가 있기 직전, 먼저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 다리가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무너질 것 같다고 신고를 거듭했지만 아무도 조처하지 않았다. 26년 전 그 소식은 뉴스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고 그 순간 우리는 모두 분노했겠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잊었다. 분노와 슬픔은 그 유통기한이 애초 다르다. 분노와 억울을 제대로 기억하는 건 유가족들 뿐일 테다. 그것들은 유가족의 가슴에 영영 사라지지 않는 멍으로 남아 그들의 삶을 벌레처럼 갉아먹겠지만 나머지는 잊겠지. 다 잊겠지.

세월호 6주기가 다가온다. 벌써 6년이라니.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뉴스를 봄날 아침, 거실에 앉아 하릴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던 그때가 벌써 6년 전이라니. 이상하잖아, 저렇게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저 아이들을 아무도 꺼내주지 못한다니. 우리는 끝없이 분노했고 억울했고 더할 수 없이 슬펐다. 뉴스를 끄고도 친구와 만나 와글와글 신나게 떠들 수 없었던 우울의 시기를 우리는 다 같이 지났다. 고작 6년밖에 지나지 않아 세월호는 아직 아물지 않은 피딱지다. EBS '호기심 딱지'를 제일 좋아하는 여섯 살 딸아이는 '호기심 딱지'의 등장인물들이 가르쳐준 것들을 내 앞에서 자랑하는데, "엄마, 피딱지는 함부로 떼면 안돼. 혈소판이 열심히 만든 거거든. 피딱지를 억지로 떼면 혈소판이 또 일을 해야 해. 피딱지를 만드느라 혈소판들이 죽었는데, 또 만들면 혈소판들이 또 죽어. 피딱지는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알겠지?" 그렇게 내내 떠든다. 유가족들에게 그 피딱지야 저절로 떨어질 날이 있을까마는, 그 피딱지를 우리가 손댈 일은 아닌 거다. 선거를 앞두고 터져 나오는 세월호 막말에 가슴이 저린다. 슬픔만 기억하고 분노와 억울을 자꾸 잊어가는 이 무심함을 미안해하기는커녕 남의 생채기를 함부로 헤집고 피딱지를 마음대로 건드릴 거라면 이딴 선거, 왜 하는가 싶기도 하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