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과정 한 후보가 시인에 한 말
'~나 하라' 토씨에는 '너 따위' 내포
우월감 앞세운 '폄하의 어감' 짙어
자신이 더 낫다는 가치를 호소하되
상대방의 인격은 존중할 수 있어야

2020041301000661200033061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번 총선의 의미는 여러모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난국이 닥쳤을 때 어떤 태도와 언어와 의지로 임해야 하는지를 국민들은 따졌을 것이고, 대의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시민적 가치와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강한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이념, 지역, 세대, 계층, 젠더 별로 엄존하는 전선이 있고 그 경계선들은 여지없이 배타적인 타자 배제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 총선은 그것을 어느 정도는 뛰어넘었고 어느 정도는 전혀 새로운 틀을 향해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만 보면 여전히 당파적 이익에 골몰하는 후진적 정치의 민낯을 보게 되었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국민들은 오히려 합리적 혜안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 환멸의 정서를 부추기면서 자신만은 예외적 우월성을 가지고 국민들을 호도하려 했던 이른바 '꼰대 언론'들에 대해 경고장을 날렸다. 뻔뻔한 이데올로그들이 소속 언론사의 총론에 복무하느라 분주했지만 국민들은 거의 현혹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총선의 밑바닥에는 폭언과 막말로 얼룩진 도덕적 결여 상태가 깊이 잠복되어 있었다. 예기치 않게 튀어나온 실언이야 귀엽게 봐줄 수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계산된 폭언과 망언은 우리 정치 수준을 여전히 답보 상태로 만들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선거 막판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네거티브 공세, 색깔론, 가짜뉴스 등은 정파 사이에 존재하는 소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발본색원되지 않은 정치적 유습으로 이번 선거 국면을 감염시켰다. 어쨌든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 시행된 선거였던 만큼 국민들은 자신이 지지할 대상이 얼마나 신뢰를 받을 만한 세력인가를 물었을 것이고 폭언과 막말을 멀리 퇴출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언론에서 '막말'이라고 규정하는 표현은, 물론 언론사마다 이해관계에 따라 과장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지만, 가치판단의 합의가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폄하라든지 신체 비하, 세대 비하, 젠더 비하, 성희롱, 욕설, 비방 등이 단골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거의 보도되지 않은 것 가운데 다음 표현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토론 과정에서 한 후보는 시인인 상대 후보에게 "시인은 시나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문화예술이나 체육 종사자들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 자신의 전문 영역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말을 했던 후보의 소속정당에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탁구나 쳤으면 좋겠다", "바둑이나 두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분들도 탁구나 바둑의 경험을 정치에 접목하여 우리 사회를 진일보 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때 '(이)나'라는 토씨에는, 이쪽은 너 따위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우월감을 통한 상대 폄하의 어감이 짙게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보자. 도로를 달리다가 운전하는 여성을 보고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라고 했다면 그것은 여성에 대한 폄하는 물론 '밥을 하는 노동'에 대한 비하를 안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대통령이나 하라"라고 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일이 '(이)나'라는 조사로 포괄하기에는 워낙 막중하고 큰 역량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애나 보라", "밭이나 매라", "노래나 하라"는 모두 보육, 농사, 예술에 대한 무시요, 자기는 그런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우월감의 반영일 뿐이다. 따라서 "시나 쓰라"는 말은 막말 수준인 셈이다. 그는 무의식중에 '시, 정치'라는 불균형을 내면화한 채, 시를 쓰는 후보에 대한 인격적 존중 대신 시 따위나 쓰는 주제에 정치를 하려 하느냐는 타자 배제의 언어를 통해 이 땅의 시인들을 모두 무시한 꼴이 된 것이다.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너나 잘 하세요!" 그래야 상대 폄하의 막말은 종언될 것이고, 누구든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나은 가치를 품고 있다는 것을 호소는 하되 상대방의 인격과 가치는 존중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