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저는 김영삼 총재가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여 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조국의 통일에 큰 기여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후광(後廣) 김대중의 목소리는 그렇게 떨리고 있었다. 1992년 12월 19일의 일이다.
후광이 통곡과 비감을 가슴속으로 깊게 삼키면서 이런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정계 은퇴선언을 할 때, 많은 국민은 진심으로 동정과 사랑이 담긴 박수를 그에게 보냈다. 이에 화답하듯 후광은 '한국 현대 정치사'를 쓰겠노라고 말했다. 평생 정치적 라이벌이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대통령이 되었고, 한 명은 정계 은퇴를 발표했으니 많은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 양김(兩金)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2년 7개월 후 후광은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야의 '올드보이' 정치인 상당수가 여의도를 떠나는 처지가 됐으니 말이다. 민생당의 손학규 상임선대위원장, '정치 9단'으로 불리던 박지원(4선) 의원, 20대 국회 최다선(8선)인 우리공화당 서청원 의원, 천정배(6선) 등이 21대 총선에 줄줄이 낙선하며 국회 재입성에 실패했다. 여기에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문희상(6선)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7선) 대표, 미래 통합당의 김무성(6선) 의원 등도 정계를 떠날 것이 확실시 된다.
정동영 민생당 의원이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며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미 손학규 위원장은 선거 다음날 "참담한 결과에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모두 민심을 헤아리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며 "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밝혔다.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제 우리의 불만스런 겨울은 이 '요크'의 태양 덕분에 빛나는 여름이 되었다." 올드보이의 대거 퇴진이 '지겨운 겨울이 가고 영광스런 요크의 여름이 오듯' 한국 정치에 새 바람이 불지, 아니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올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 무대가 '아니면 말고'가 다반사인 정치판이라 더 그렇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