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끝난 3일째 상가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보수·중도·진보' 2명씩인 6명
정치얘기 사절 묵계깨고 주고받는 비판 속
결론은 '초유의 이상선거' 동의… 잘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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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주필
4·15 총선이 끝난 지 3일째 되던 날, 상가(喪家)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 뜸했는데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한 명, 두 명씩 모여 어느새 여섯 명이 되었다. 첫날이라 한가했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는 몰라도, 집 식구가 몇 명인지는 잘 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었다. 물론 정치적 성향도 잘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 진보 2명 보수 2명 중도 2명이었다. 수다가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아는 남자들의 번개 저녁 식사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고인의 연세가 94세였다는 상주의 말에 모두 놀랐다.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인간 수명과 고령화 시대의 노후대책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이 때부터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여차 여차해 재난 기본소득에 이르면서 보수 1이 선거를 앞두고 실시한 그 진정성에 의심을 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진보 2가 그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추세라고 답했다. 미국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자 보수 2가 선거를 앞두고 돈을 퍼붓는 것은 금권선거와 뭐가 다르냐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진보 1은 "하여튼 보수들 생각은 늘 저래"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이때 중도 1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판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언젠가, 태극기 집회에 갔다 왔다고 말 한 보수 1과 태극기 집회를 극도로 혐오하는 진보 2가 승강이를 벌인 후, 정치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사이의 일종의 '묵계'였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가자 보수 1이 진보 1·2를 보면서 "그래서 좋아"하고 다시 운을 뗐다. 이번 총선에서 180석을 가져갔으니 기분이 좋으냐는 뜻이었다. 조금의 비아냥이 섞여 있었지만, 진보 2가 의외의 말을 했다. "우리도 놀랐어. 180석이 뭐야." 표정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수 2가 그걸 고깝게 받아들였다. "2중대까지 포함하면 190석이야, 어리버리한 보수 몇 명 끌어들이면 개헌도 가능하지."

중도 1은 분위기가 과열된다 싶으면 열심히 술을 따랐다. 덕분에 분위기가 진정됐다. 하지만 이번 4·15 총선이 사상 유례없는 이상한 선거였다는 데는 모두 동의했다. 막판까지 논란을 일으킨 미래 통합당의 한심한 공천에 대해서는 보수 1·2 진보 1·2 중도 1·2 모두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정당에 과연 미래를 맡길 수 있느냐고 진보 1이 또다시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자, 진보 2가 더는 말하지 말라고 그를 툭툭 쳤다. 그건 보수 1· 2가 할 얘기지 진보 1이 참견할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배려였을 것이다. 비례대표 연동제라는 근본도 없는 제도가 만든, 3번부터 시작하는 48.1㎝의 투표용지에 대해서는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진보 1은 벌써 노안이 와서 지지 정당에 기표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중도 2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치 얘기가 제일 재밌기는 해. 근데 지금 하는 거 보니 21대 국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봐.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거를 치렀니. 표 구걸 하려고 선거 때만 저랬지, 막상 의원 금배지만 달면 사람이 바뀌잖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 여당체제라는 것도 실은 두려워. 또 2년 후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잖아. 대통령 권한이 무지막지하게 센 나라라 아마 그 자리 차지하려는 싸움이 볼만할 거야. 그런 면에서 민주당의 앞길도 탄탄대로는 아니라고 봐. 여론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이낙연과 친 문 세력의 갈등이 커져 어쩌면 당이 깨질지도 모르지."

우리는 중도 2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우리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결론은 중도 1이 내렸다. "아무렴. 건강이 최고야. 술 조금만 먹고, 나라 걱정 적당히 하고 건강 잘 챙기길 바래. 나라야 잘난 정치인들이 알아서 지져 먹고 볶아먹으며 잘 끌고 나가겠지. 진보 1. 너 대학 다닐 때 백골단으로 데모 막았잖아. 그리고 보수 2. 기억 안 나? 시청 앞에서 데모하다 누가 던졌는지 머리에 돌을 맞아 피나고 생난리 피운 거. 그런데 어떻게 성향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어. 하긴 우리나라에 진보 보수가 어딨겠니. 이제 앞으로 만나면 우리 정치 얘기는 그만하기. 이제 정치는 여기서 끝!"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