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고교시절 시험때 소설읽다 커닝 낙인
사실을 말하려다 혼날까 포기했던 기억 소환
출근길 라디오에서 야한책 보다 체벌 상심
투신중학생 사연… '침묵 당하는 진실은 毒'


임성훈 논설위원
임성훈 논설위원
부끄러운 '흑역사'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의고사를 치를 때다. 내신성적에 반영 되지 않는 시험이어서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던 것 같다. 그게 화근이었다. 당시 필자는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에 푹 빠져있었다. 시험 종이 울렸는데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시험문제 빼곡한 시험지 아래 책상 밑에서는 의협심 넘치는 청년의 통쾌한 무협 판타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결국 그 판타지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시험 시간 내내 몰래 소설을 뒤적이는 모험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교단에서 보면 전형적인 부정행위로 비쳤을 게 뻔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후방으로 접근하는 존재를 인식할 겨를도 없이 뒤통수에 초강력 스매싱이 꽂혔다. "이 놈이 감히 시험시간에 커닝을 해?" 불호령에 이어, 강도는 약해졌지만 스매싱이 몇 차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잔머리를 굴리며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찾았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덜 맞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이었지만 선생님의 표정을 보는 순간 포기했다. 선생님이 "오! 그러니? 너 책을 정말 좋아하나 보구나. 앞으로도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무나!"라며 부드러운 어조로 다독여줄 리 만무했다. 십중팔구 "이 놈이 감히 시험시간에 소설을 봐?"식으로 단어 몇 글자 바꾼, 처음과 동일한 반응이 나올 게 뻔했다. 아니 '신성한 시험을 모독했다'며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학교에서 필자는 부정행위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다른 반 친구 녀석이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너 커닝하다 들켰다며?"라고 놀리고 도망가는 통에 나중에는 녀석이 '출몰'하는 순간 던질 칠판지우개까지 준비한 적이 있다. 명중했을 때의 분필가루 비산(飛散)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번도 아니면서 칠판을 지우는 자원봉사(?)까지 했다.

시험 시간에 소설책을 본 게 분명 잘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일은 다소 억울함을 동반한 트라우마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왜일까?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어느 중년 여자의 물기 머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해 3월25일 경북 포항의 한 중학교에서 투신해 숨진 김모군의 어머니 정모씨였다. 김군은 자율학습 시간에 소설책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켰는데 야한 책을 봤다는 이유로 20분간 엎드려뻗쳐 체벌을 받았다.

김군은 이어진 체육시간에 홀로 교실에 남아 있다가 '살기 싫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기 좋은 조건이 됐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교실에서 투신했다. 투신하기 전 CCTV에 찍힌 김군의 모습을 전할 때 정씨의 목이 메었다. "4층으로 내려와서 창밖으로 친구들 운동장에서 수업하는 걸 물끄러미 보더니 바닥을 내려보다가 발로 휘젓다가 망설이는 듯이 5층으로 다시 올라가더라고요. 그 때 제가 CCTV에 손을 넣어서 애를 붙잡고 싶었어요. 올라가지 말라고, 애를 붙잡고 놔주고 싶지 않았어요." 지하로 접어들던 출근길은 울먹이는 목소리에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음이 더해져 더 쓰라렸다.

정씨가 원한 것은 단지 '진실'이었다. 해당 교사가 최근 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은 것도 무의미해 보였다. 정씨는 "선생님도 애초에 저희 아이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란 걸 예상하지 못하고 혼을 내셨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무슨 상황이었길래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20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 입으로 직접 그 얘기를 듣고 싶었다"고 했다.

니체는 "침묵을 당하는 모든 진실은 독이 된다"고 했다. 또 헤겔은 "합리적인 것은 진실하며, 진실한 것은 합리적이다"라고 했다.

출근길, 자식을 잃은 한 어머니의 인터뷰는 '진실'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해 주었다. 필자의 부끄러운 흑역사에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쉬움이 깃들어 있는 것도, 당시의 행위가 진실을 기반으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