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북한의 박영수 협상대표가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고 폭언을 하고 회담장에서 뛰쳐나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른바 '서울 불바다론'. 그의 말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재기하려는 사람들로 가게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그 해 6월에는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하자 또 한 번 사재기 바람이 불었다.
이처럼 북한이 의도적으로 군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사재기 바람이 불고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북핵과 분단국가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용어가 그래서 생겼다. 하지만 그 후 남북관계에 긴장감이 일어도 사재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터져도,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가 포격을 당해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사재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 사망소식에도 대형마트, 편의점, 슈퍼 등 유통 시장은 평소 때와 다름없었다. 수없이 반복된 '학습효과' 탓이다.
'김정은 신변 이상설'이 장기화하면서 최근 평양에서 생필품 사재기 바람이 불고 있다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가 나왔다. 기사를 작성한 애나 파이필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 전문기자다. 서방 언론인들 가운데 북한 정보에 가장 정통한다는 평을 듣는다. 십여 차례 이상의 북한 현지취재를 통해 북한정권의 향방을 꾸준히 추적했다. 김정은 평전 '마지막 계승자'(프리뷰 간)의 저자이기도 하다.
기사에 따르면 평양 엘리트들 사이에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과일과 채소, 쌀, 술 심지어 전자제품까지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의 기사를 '가짜뉴스'로 규정하고 발끈했다. 북한과 우호적인 러시아의 타스 통신 역시 "평양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평양 통신원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기사 중 관심을 끄는 건 '과거에도 북한 지도자의 사망설이 있었지만, 이번 루머는 상황이 달라 보인다'는 대목이다. 현재 워싱턴포스트 베이징 지국장으로 중국 고위층과 밀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기사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어찌 됐건, 남한에서는 사라진 사재기가 평양에 등장했다니 묘한 기분마저 든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