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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민통련 등 재야세력과 학생들은 신민당이 추진하고 있는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를 계기로 전면 반독재투쟁에 나선다. 1만여 명의 전투경찰이 동원된 인천 주안동 대회 현장에서 각종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고 있는 군중들./경인일보DB

인천시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인천 5·3 민주항쟁' 등 인천지역 민주화운동 역사와 의의를 후대에 알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에 나섰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는 5·3 민주항쟁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공식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에 포함하기 위한 범시민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앞 옛 시민회관 사거리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그해 2월 총선에서 직선제 개헌을 공약한 신민당이 인천에서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현판식 대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이날 인천시민들과 학생들은 낮 12시께 거리로 한꺼번에 나와 직선제와 노동삼권 보장 등을 외치며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벌어진 최대 규모의 거리시위였다. 당시 시위가 벌어진 옛 시민회관 사거리에는 이를 기념하는 계승비가 항쟁 30주년인 2016년 설치됐다. 계승비에는 "다시 부르마, 민주주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5·3 민주항쟁은 이듬해인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정부 여당은 5·3 민주항쟁을 '반미시위', '북괴의 주장에 동조해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전복하려는 급진좌경학생 시위'로 규정했다. 5·3 민주항쟁은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난 대중 시위로 학생운동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참여 속에서 '이념 투쟁'을 벌인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날 시위로 319명이 현장에서 체포됐고, 129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후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5월 말에는 170명이나 구속되는 대규모 사태로 번졌다. 국가보안법 위반을 비롯해 소요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가 적용됐다. 개헌추진위의 지부 현판식은 인천에 앞서 서울과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서도 있었는데 일부 시위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인천에 비해서는 적은 규모였다.

이어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한 은폐·조작 폭로, 6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은 바로 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인천에서는 5·3 민주항쟁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위상을 제대로 인정받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5·3 항쟁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규정하는 민주화 운동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다.

현재 정부가 법으로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은 2·28 대구 민주화운동, 3·8 대전 민주의거, 3·15 의거, 4·19 혁명,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10 항쟁이다. 5·3 민주항쟁은 아직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윤관석 의원(인천 남동구을)이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20대 국회의 임기종료와 함께 폐기될 상황에 놓였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는 올해 개원하는 21대 국회를 통한 법 개정을 재추진할 계획이다. 또 이를 위한 범시민 캠페인과 서명운동 등을 전개할 계획이다.

인천시는 5·3 민주항쟁 기념관 건립 사업을 올해 본격 추진한다. 기념관 입지 선정과 전시 콘텐츠 기획을 위한 학술 용역을 이달부터 연말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또 센터와 함께 정부와 국회에 법 개정을 공식 건의할 방침이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이은주 사무처장은 "인천에서 나온 구호는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6월 항쟁의 단일 구호로 계승됐고, 야당과 일부 재야세력의 타협적 개혁노선으로 분열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됐다"며 " 6월 항쟁의 도화선이자 진정한 민주개혁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