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치원해문이'
팬데믹·'햄릿'과 연결된 작품
불합리·모순과 결별 새 세계 선언
연극 매체도 제작·관객 수용 등
또다른 전환 모색해야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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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조치원해문이'(이철희 작·연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두 사건과 만나는 작품이다. 하나는 작품 외적 상황인 현재의 팬데믹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구조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연결되어 있다.

지난 4월은 이른바 랜선 공연이 기존 공연을 대체했다. 대표적으로 국립극단 온라인 상영회를 통해 네 작품, 남산예술센터 온라인 스트리밍 상영을 통해 다섯 작품이 랜선을 따라 관객을 만났다. 해외의 유명 작품을 유료로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랜선 공연은 기존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했던 경우도 있었고, 기획 단계부터 영상 제작을 목표로 제작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 편차야 어떠하든 극장에서 직접 관극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연극 '조치원해문이'는 극장 공연(10일~12일, 17일~19일)과 랜선 공연(16일)을 함께 올린 작품이다. 거리두기 객석제 운영으로 60여 명이 관극한 12일의 극장 공연과 달리 16일의 랜선 공연 관객은 이만 명이 넘었다. 관객 수만 단순 비교하자면 랜선 공연이 압도적이다.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관객 수 정보와 채팅 창을 통한 감상의 공유는 랜선 저 너머의 관객을 상상하게 만들 정도였다.

'조치원해문이'는 재난이나 역병을 다루는 작품이 아님에도 팬데믹 이전과 이후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과거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을 맞이한 이후에도 비록 그 영향력이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연극 매체는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 왔다. 마찬가지로 팬데믹 이후의 연극 매체는 공연 예술의 제작 방식에서부터 관객 수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조치원해문이'는 '햄릿'을 소환하고 있는 작품이다. 단지 '조치원해문이'의 갈등 구조가 '햄릿'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환의 시대를 모색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전환과 관련하여 그 유명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독백은 다시 읽어야 한다. '조치원해문이'도 "내가 살든지 뒈지든지 매조지를 져야 되여"라는 대사로 옮겼다. 하지만 이 대사는 살고 죽는 선택의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살고 죽는 선택의 문제로 읽는 한에는 대부분 사는 것을 택하기 때문인데, 정작 '사느냐'를 번역한 'To be'는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햄릿에게 있어 'To be'의 상태는 지금의 세계 상태, 곧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현재의 세계 상태를 말한다. 그 세계 상태는 삼촌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 왕위를 찬탈한 삼촌으로부터 살해당할 위기에 놓여 있는 햄릿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장례식에 썼던 음식을 어머니의 결혼식에 그대로 썼던 상태의 지속을 견디고 목숨만 겨우 유지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이 'To be'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독백은 "견딜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로 읽는 것이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세계로부터 복수를 결행하려는 햄릿의 고뇌를 더욱 잘 드러나게 한다. 그 결단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이전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후의 세계로 전환을 선언하는 독백 장면인 것이다.

연극 '조치원해문이' 혹은 '햄릿'은 낡은 시대의 모든 견고한 것을 녹이는 전환을 모색하려는 자라면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고뇌와 결단의 순간을 담고 있다. 이전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후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전환은 거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담고 있다. "다 태워버릴겨"라고 외친 해문이는 자신이 태워버리고자 했던 그 낡은 것과 함께 스러져간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해문이와 햄릿은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려는 자는 낡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용기가 있는가라는 물음 다음에 마저 쓰지 않은 한 줄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까지도.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