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눈으로 듣는 음악' '귀로 듣는 그림'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5월을 노래한 시가 많다. 당장 괴테의 '5월의 노래'가 떠오른다. '해는 빛나고 들은 웃는다/나뭇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넘쳐 터지는 가슴의 기쁨/대지여, 태양이여/행복이여 환희여/사랑이여 사랑이여/저 산과 산에 걸린 아침 구름과 같은/금빛 아름다움/그 기막힌 은혜는 신선한 들에 꽃 위에 넘친다.'
햇빛에 반짝이는 신록의 잎사귀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살아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고귀한 생명력. 눈이 부신다. 피천득은 5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다. 우리도 눈매가 한없이 푸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5월이 오면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은 뛰노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기는 나의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
지금은 무지개를 보기가 밤하늘의 별을 보기만큼 어렵지만, 그때는 무지개가 별만큼이나 흔했다. 그래서 소중한지도 몰랐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를 읊조리며 "이게 말이 되느냐"며 친구들과 얼마나 킥킥거리며 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그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5월을 맞이할지는 몰랐다. 원래 5월은 도약하는 달이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도 가정의 화목을 바탕으로 큰 꿈을 성취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 5월은 어떤가. 가슴은 메마름으로 석고처럼 굳어있고, 마치 한 마리 부패한 생선처럼 희망도 행복도 변질해 가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5월은 슬픈 달이 돼버렸다.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푸른 빛을 볼 수 있는 한 뼘의 정원이라도 갖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런 '한 뼘의 정원'이다. 위정자도, 부자도, 빈자도, 어린이도, 어버이도, 스승과 학생도 가슴속에 푸른빛이 와 닿는 '한 뼘의 정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잃어버린 5월을 되찾아야 한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