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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다와 고택의 햇살이 그리웠다
그래서 찾은 곳이 허난설헌의 생가
시공을 넘은 햇빛·해안바람을 쐰다
해파랑 길까지 걸은 후 폐사지 도착
온화한 석탑·불상은 당시 번창 전언


에세이 김인자2
김인자 시인·여행가
봄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택 툇마루에 내려앉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따사로운 봄 햇살이 그리웠다. 그렇다면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한달음에 닿을 수 있는 강릉이 발아래 있으니까. 나는 허난설헌 생가에 들러 후원을 지키는 믿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를 두 팔 가득 안아보고 싶었고 안겨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고가 툇마루에 앉아 봄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아보고도 싶었다. 이런 날엔 경포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해파랑길(동해안의 상징인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로 총 길이는 770㎞로 남한 최장 트레일)을 짧은 구간이라도 유유자적 걸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 이미 나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강릉시 내곡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신복사(神福寺) 절터, 신복사지다. 허난설헌이 태어났다는 생가와 폐사지, 어느 곳을 먼저 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나는 내곡동을 지나 경포호 가까운 허난설헌의 생가에 먼저 도착하고 말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나들이객은 현저히 줄었고 평일이라 그런지 주차장 역시 한산했다. 지난 가을에 둘러 보고 다시 봄이니 가장 좋은 계절에 이 고택의 정취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여간 호사스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나는 고택의 뜰을 거닐다가 햇살이 가장 많이 머무는 툇마루에 자리를 잡고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심호흡으로 맘껏 들이켰다.

시공을 초월해 지금 내게 도착한 이 빛은 허난설헌이 살던 시대를 넘어 예까지 끊어짐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기에 아쉬움이 없다. 토담 아래엔 난초가 꽃으로 환생을 거듭하고 미풍은 내 살갗을 간질이고. 햇살 아래 달달한 꿈도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후원을 걷는다. 강릉을 대표하는 나무가 소나무여서 강릉을 소개할 때 반드시 붙은 이름 '솔향강릉', 이곳 소나무는 그 명성에 걸맞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듯, 그도 아니면 어떤 특별한 흡인력이나 에너지가 있는지 언제 봐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해 누구라도 안아보거나 기대거나 다가가게 만든다. 솔밭을 뒤로 하고 허난설헌의 생가를 나와 경포에서 사천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을 걷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신복사지로 향한다.

시간은 오후 2시를 통과하고 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 신복사지에 도착하니 시내에 근접한 곳이지만 폐사지가 주는 분위기는 역시 고적한 평화다. 낮엔 다소 더위를 느낄 정도였지만 서쪽 대관령에서 내려오는 솔바람으로 이곳은 더위보다 차라리 추위에 가깝다. 복잡하지도 화려하지도 휑하니 넓지도 않은 그래서 안정감이 있는 신복사지, 여기저기 초록 잔디를 뚫고 나온 노란 민들레가 방문자를 반기고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찾아온 걸까. 주변은 야트막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저만치 도심의 고층 아파트가 시야에 거슬리긴 해도 눈앞에 초록이 있어 금세 그 사실을 잊게 만든다.

폐사지에 들자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자세로 같은 고려시대의 불상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 높이 181㎝)은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개태사 석조보살좌상(머리 부분 결손)과 함께 고려 초에 만든 공양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보살상이 시선을 끈다. 역시 이곳 신복사지에 남아있는 불상은 풍만한 몸과 후덕하고 온화한 인상을 품고 있어 누가 봐도 친숙한 느낌을 갖기에 부담이 없다. 그 시대 석공은 돌 안에 저토록 후덕한 보살이 숨어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나 반타원형으로 조각된 보발(寶髮)이나 일정한 무늬를 가진 옷주름 등에서 진보된 형식을 보여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복사, 신복사지의 배치는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뒤로는 금당지, 양옆에는 회랑지가 있는 고려시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폐사지에는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만이 남아 이곳이 한때 번창했던 사찰로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많은 불자들이 드나들던 도량이었음을 조용히 전언할 뿐이다.

/김인자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