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괘서사건 연루 유배중 숨져
귀양살이 전후로 서체비교 의미
인천 연수구 동춘동 '영일 정씨' 묘역 내 정우량(鄭羽良·1692~1754) 선생 묘에 묻힌 묘지석에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묘지석 글씨를 쓴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강화와 인연이 깊어 인천의 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론계열 명문가 후손인 이광사는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 노론이 득세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관직을 포기한 이광사는 1732년 강화로 들어와 '강화학파'의 창시자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맥을 이었다. 글씨는 강화에서 정제두 문하에 있던 당대의 명필 윤순(尹淳·1680~1741)에게 배웠다. 원교의 학문과 서예의 뿌리가 강화인 셈이다.
이광사는 40세를 전후해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로 명성을 떨쳤다. 원교체 특유의 삐뚤빼뚤하면서도 기세가 좋은 서법은 당대에도 논란거리였다.
동시대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제주도 유배길 도중에 들른 해남 대흥사에서 이광사가 쓴 편액을 보고 "저것도 글씨냐"며 자신의 글씨를 걸었다가, 8년 후 유배생활을 마치고 찾은 대흥사에서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광사는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라 불리는 소론 주도의 역모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 전라도 진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영일 정씨 동춘동 묘역의 묘지석 글씨는 정우량 선생이 작고한 1754년께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광사의 귀양살이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의 유배 전후 글씨체를 비교할 수 있는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클 것으로 보인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강화학파서 학문과 서예 배워… 추사 김정희도 인정한 '원교체'
'정우량 선생 묘지석' 쓴 이광사
입력 2020-06-10 23:06
수정 2020-06-1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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