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도 왜놈 것 못먹어" 항거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 상소를 올려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이 퇴진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개항을 하게 됐다. 이때 최익현은 경복궁 궁궐 앞에 엎드려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일본의 무력 앞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면 일본의 침략을 계속 받게 될 것이란 점, 일본과 서양 세력은 같은 무리여서 우리의 전통 사상을 해치게 될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강화도조약은 체결됐고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이후 최익현은 20년 동안 고향인 포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을미 사변이 일어나고 을사 늑약마저 체결되자 다시 세상에 나왔다.
최익현은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을 소리 높여 반대했다.
또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을 찾아 나섰다. 80여명으로 시작된 의병은 정읍을 거쳐 순창에 가는 동안 늘었지만 실제 무기를 갖추고 싸울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동원해 의병 진압에 나섰고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 지도부는 체포돼 일제 헌병대에 넘겨져 서울로 끌려갔다.
일제는 1906년 8월 14일 최익현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대마도로 끌고 갔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머리카락을 일본식으로 자르라는 요구에 항거해 "쌀 한 톨도 왜놈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으로 저항했다. 대마도주의 사과와 왕명을 받아들여 단식은 중단하지만 몸이 약해진 그는 결국 병이 들어 1907년 숨을 거두게 된다.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출처/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