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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경인일보가 기획기사로 다룬 '국민방위군' 지면. /경인일보DB

故 유정수씨 일기로 참상 '재조명'
급조된 교육대 병사양성 역량 부족
지휘부는 물자 착복·폭력 일삼아
조사때도 낙오자 행방 언급 안돼


올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를 통해 한국전쟁의 참상을 배웠지만, 유독 전쟁의 포화에 스러져간 민간의 피해는 접하기 어렵습니다.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에서 민간이 입은 피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경인일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故 유정수씨의 일기를 토대로 당시 전쟁의 참상과 국민방위군이 입은 피해를 보도했습니다.(6월 15일~18일 1,3면 연속보도)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면서 북한군에게 서울을 뺏기는 1·4 후퇴를 앞두고 정부가 반강제로 징집해 편성한 것이 '국민방위군'이었습니다.

당시 국민방위군 징집총수는 60만명이 넘었지만 군사교육 등 전쟁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지원이 전무했다고 전해집니다.

유엔군이 우리나라 주요 도로의 민간인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은 남쪽에 설치된 교육대로 이동하기 위해 산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때는 추위가 가장 컸던 12월~1월이었지만 제대로 된 피복과 음식도 지원되지 않아 많은 수의 국민방위군이 거리와 산속에서 동사하거나 아사했습니다.

어렵게 도착한 교육대는 시설이 열악했고 장티푸스 등 각종 질병에도 치료약이 부족했습니다. 실제로 1951년 국회가 조사한 국민방위군 실태에 따르면 교육대에 수용된 국민방위군은 38만여명, 낙오자는 27만여명에 달합니다.

더불어 급하게 구성된 국민방위군 교육대는 병사를 양성할 역량이 없었고 당시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한 국민방위군 지휘체계가 국민방위군이 받아야 할 물자를 착복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훈련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유씨의 일기에는 "주식후 겁내며 기다리든 무서운 기합을 받았다 이유는 변소사번이 불찰하여 청결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개인적으로 잘한 사람도 있으나 대대전체적으로 보아 불미하니까 연대기합을 받으라는 것이다. 약20회 엎두러뻐처를 하곤 장작개비로 다섯 대식 맞었다"(51년 1월 10일)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국민방위군 사건은 제대로 된 조사도,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도 없습니다.

1951년 1월 제2대 국회가 연 국회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등을 통해 현금 24억여원과 양곡 1천800여가마 등을 부정처분한 것을 확인해 국민방위군 사령관, 부사령관 등 고위직 5명을 처형한 것 외에는 아직까지 정확한 피해규모도 알 수 없고 사망·실종된 국민방위군 행적 역시 유족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청원을 접수한 후 조사를 시작했지만, 일반 병사와 달리 정부나 군으로부터 전사 및 사망 통지를 받지 못한 국민방위군은 단 14명만이 진실규명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이번에 일기에 공개된 유씨 역시 생전 국민방위군 경험을 꺼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보다 불과 2~3살 많은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의 피해를 받았거나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군에 자원입대를 해야 하는 당시의 현실에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조사를 끝내며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뒤 국방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1천234명이라는 피해상황을 발표했으나, 38만여명(국방부 추산)에 달하는 낙오자의 행방은 전혀 언급이 없다"며 국가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최종 결론을 냈습니다.

지금의 평화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면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