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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수원비행장에서 미군 C-54 수송기가 북한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불타고 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수원 모습 중 일부로 수원시가 24일 공개한 사진이다). /수원시 제공

수도 역할 대신한 '전략적 요충지'

맥아더 찾아 인천상륙작전 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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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되면 우리의 마음 한 편에 자리한 서늘함이 고개를 든다. 7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이 트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한반도의 평화가 총성과 함께 깨지면서부터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경인일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 현장 그 곳' 시리즈를 통해 전쟁의 상흔을 기록한다. → 편집자 주

전쟁이 시작된 다음날인 26일,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됐다. 서둘러 정부와 국회는 '수원'으로 이동했다. 수도 서울이 무너지면 수원은 서울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미국 행정부의 결정에 따라 27일 미극동군사령부가 수원에 전방지휘소 겸 주한연락단(ADCOM)을 설치했다.

전방지휘소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차려졌다.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고 육군본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KMAG)까지 수원농업시험장으로 본부를 이전했다.

수원농업시험장은 한국전쟁 초반, 한미 양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곳에서 한미 양군은 방어작전을 주도했다. 미극동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전쟁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자, 대전으로 피난갔던 이승만 대통령도 수원에 올라왔다. 이때 '인천상륙작전' 등 여러 작전들이 구상됐다.



 

하지만 방어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30일 수원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 병력을 적으로 오인해 전방지휘소에 "적의 행군종대가 수원 동쪽에서 서진해 현재 수원으로 접근 중"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면서 전방지휘소 등 한미 양군의 핵심기지가 수원에서 철수, 대전으로 옮겨갔다. 7월 4일, 북한군은 수원을 점령했다. 수원을 잃자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다시 전세가 역전된 후 22일 수원을 수복했다. 특히 일제 때 태평양전쟁의 전초기지로 지어진 수원비행장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수송과 보급기지로 역할을 수행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발생했고, 1951년 1월 7일 수원은 또 다시 중공군에 점령당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월 15일 '울프하운드'와 25일 '선더볼트' 작전을 통해 평택과 오산, 여주 등 수원 인근 지역의 통제선을 조금씩 점령해갔다. 마침내 1월 27일 수원 칠보산을 공격해 수원을 재탈환했다.

수원은 4번에 걸쳐 한미 양군과 북한군의 점령과 탈환이 반복됐고 그만큼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수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감당해야 했던 아픔이다. 이로 인해 수원은 한국전쟁 기간 중 도시의 상당 부분이 심하게 파괴됐고 인명피해는 물론, 넘쳐나는 피난민들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