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발발후 첫 유엔군 전투가 벌어졌던 곳
美특수부대 540명, 5천명에 맞선 죽음의 임무
비록 패했지만 北혼란 진군 지연 방어선구축
북진 출발 '승리 단초'… 5일 추모공간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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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욱 오산시장
6·25전쟁 70주년이다. 오산시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과 함께 또 하나 뜻깊은 날이 있다. 바로 전쟁 발발 10일 뒤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7월5일이다.

1950년 7월5일, 맥아더 사령부 특명을 받아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540명이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맞아 유엔군 이름으로 첫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은 최강의 전차로 불린 T-34 36대와 보병 5천여 명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려왔다. 스미스 특임부대는 용감하게 맞섰지만 6시간15분의 전투에서 186명의 사망자를 내고 비참하게 패배했다. 105㎜ 곡사포로 전차에 대적하기는 결과가 너무 뻔했기에, 맥아더 장군은 이 부대 임무를 "죽음의 임무"라 하기도 했다.

죽미령 전투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마주하던 전장에 유엔군이 처음 투입돼 6·25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한 첫 출발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스미스부대 생존 용사들은 1955년 지역 주민과 함께 죽미령의 전투 장소에 부대원 숫자와 같은 540개의 돌을 쌓아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로부터 매년 7월5일 죽미령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

죽미령 전투는 오랫동안 '패배한 전투'라는 어두운 기억으로 존재했다.

죽미령 전투의 의미가 적극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새로 발굴된 군사자료를 보면, 맥아더 사령부는 스미스 부대를 파견한 주목적을 '승리'에 두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알려 북한군을 동요하게 하고, 진군 속도를 늦춰 낙동강과 부산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이어진 자료에서 이 점은 더욱 명확하다. 죽미령에서 스미스부대를 대적한 북한은 혼란에 빠져 남진을 10여일 지체했다. 이 기간 북한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에게 미군 참전을 알리고 소련도 참전해 달라고 애원하는 긴급한 서신도 발견됐다.

전황을 통해서도 우리는 죽미령 전투가 잊혀야 할 패배한 전투가 아님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죽미령 전투로 시간을 번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서 북한군을 막아냈고, 이를 기반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일거에 전세를 뒤집었다. 요컨대, 죽미령 전투는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 남진을 일시 저지한다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북진으로 이어지는 승리의 단초를 제공, '패배가 아닌 승리의 출발점'으로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죽미령을 품은 오산시는 이 뜻깊은 곳에 합당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죽미령전쟁기념관을 건립했고, 2014년부터 '오산 죽미령평화공원'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이 프로젝트에는 오산시와 시민들뿐 아니라, 경기도, 보훈처, 국방부와 전·현직 미 연방 하원의원, 미군 당국 등 관련 기관과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지원결의안이 통과되고 미하원 외교위원장의 지지 서한이 전달되는 등 국제적 성원도 이어졌다. 죽미령평화공원의 탄생은 올바른 역사의 필연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죽미령 전투가 일어난 지 꼭 70년이 되는 202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평화공원'이 정식으로 개장된다.

추모의 공간, 호국의 공간, 평화의 공간, 감사의 공간으로 구성해 평화의 가치를 전세계인들과 함께 배우고 체험하고, 나아가 그 의미를 성찰하는 최고의 장소로 조성하였다.

부디 모든 분들이 죽미령평화공원에 들러, 바로 이곳이 한반도 평화와 자유 수호의 첫 번째 역사가 시작된 곳임을 생생하게 체감하고, 나아가 남북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지기를 바란다.

6·25전쟁은 오래전에 끝났다. 더 이상 전쟁은 필요 없다. 우리는 죽미령평화공원을 통해 후손 대대로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할 것이다.

/곽상욱 오산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