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두각… 독립운동 돕기도
나혜석은 1913년 일본 도쿄 혼고 기쿠사카초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 보통과 1학년에 입학했다. 평소 그림을 좋아했던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유학을 가게 됐다.
이후 시집을 가라는 아버지의 강요로 일시 귀국해 교사로 일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까지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1918년 3월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나혜석은 1919년 1월 21일 매일신보에 '섣달대목'이라는 주제로 4회, '초하룻날'이라는 주제로 5회 만평을 연재하기도 한다. 1921년에는 서울에서 유화 개인전을 최초로 개최했고 1922년 조선미술대전이 창시되자 많은 작품을 출품해 수상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 1923년 의열단 사건의 당사자로 체포돼 실형을 산 광복회장 유석현의 회고를 비롯해 당대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이론가 유자명의 수기에는 나혜석이 외교관 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도왔다고 증언했다.
일본 유학으로 여성 평등에 눈을 뜨게 된 나혜석은 '여자계'라는 문학잡지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자계는 한국 근대 여성들의 자발적 자의식의 성장 가능성에 바탕을 둔 최초의 여성잡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자계에서 나혜석은 1918년 3월 '경희'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소설은 결혼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나혜석의 이런 생각은 남편 김우영과 이혼 후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청구 씨에게'에서도 이어진다. 나혜석은 결혼에서부터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그 잘못됨을 드러냈다.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