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지낸 부친 작고후 과거공부
城 중심 '기습작전 수행 전술' 업적


권율
권율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의정까지 지낸 권철이다.

권율은 과거 공부보다는 책을 읽거나 여행을 다니며 지리를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과거 공부를 시작해 45세에 관직에 오른다. 권율은 다른 사람에 비해 매우 늦게 관직에 올랐고 성적도 중하위에 속해 있어 출세가 보장된 중요한 자리도 맡지 못했다.

권율은 여러 관직을 거치다 55세의 나이에 광주 목사가 돼 임진왜란 당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1592년 7월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 1천여명의 군사로 1만5천여명의 왜군에 맞서 승리(이치 전투)한 권율은 그해 12월 오산 독산성에서도 5일 동안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당시 권율은 성 안에서 방어에 치중하면서 공격할 때는 기습 작전을 펼쳤는데, 이 전투 이후 왜군을 상대하는 조선군의 전술이 전면전에서 성을 중심으로 지키면서 지형을 이용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독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은 명군과 연합해 한양을 되찾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군사를 옮겼다.

1593년 2월 3만명의 왜군이 7개 부대로 나뉘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성을 지키는 병력은 수천여명에 불과했지만 권율은 2중으로 두른 목책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공격할 화포와 석포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변이중이 개발한 화차 등 왜군보다 우수한 무기도 갖추고 있었다.

결국 조선군은 승병들의 활약과 아녀자들이 날라준 돌까지 던지면서 싸워 왜군을 격퇴시켰다. 행주산성의 승리는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권율은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관인 도원수에 오르고 왜군이 물러나는 1598년까지 군사를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 권율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선무공신 1등에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했다.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출처/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