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연극 '이카이노의 눈'
오사카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
강제동원과 4·3, 전쟁에 떠난 이들
1973년 동네 이름 지워졌어도
정체성의 물음은 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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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7월 2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이카이노의 눈'(원수일 원작, 김연민 연출, 2019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작품의 공간인 이카이노는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역의 이름이다. 시간은 1970년대 말로 설정되어 있다.

서울 대학로에서 오사카의 이카이노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1970년대의 이야기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이카이노가 지금 여기의 우리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극의 중심 인물은 영춘이다. 영춘은 남편의 첫 기일에 남편이 남긴 비망록을 다시 읽는다. 해방, 4·3, 전쟁…. 허망하기 그지없다. 유언이라 할 수도 없다. 재산 목록은 더더욱 아니다. 근현대사의 사건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 사건의 목록을 읽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남편은 왜 그런 비망록을 남겼을까. 영춘의 비망록 다시 읽기를 통해 그 물음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비망록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연극 밖으로 나와야 한다. 원작 소설인 원수일의 '이카이노 이야기'를 포함하여 재일작가의 다른 텍스트나 근현대사의 콘텍스트를 참고해야 한다. 이카이노가 도일 제주민들의 '작은 제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지난 역사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2년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하면서 제주민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는 과정, 강제동원의 역사,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4·3으로 제주를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전쟁.

극중 인물인 영춘 세대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는 김시종의 '조선과 일본에 살다'이다. 부제가 '제주에서 이카이노로'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시종은 4·3으로 제주에서 밀항하여 이카이노에 정주한 재일시인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동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없어도 있는 동네./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동네."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까/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

1973년 2월1일, 이카이노는 보이지 않는 동네가 되었다. 주거 표시를 변경한다는 행정방침으로 지역명이 사라진 것이다. 고향 제주를 떠나 객지인 이카이노에 정착한 1세대는 "고향이 객지"이며, "바다엔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일본국 이카이노'라는 주소만으로도 제주도에서 보낸 우편물이 배달되는 마을"에서 자란 연극의 원작자인 원수일 세대의 감각이다.

동네 이름이 지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극중 인물인 전홍과 마리를 통해 다른 감각으로 제기된다. 영춘의 손자인 전홍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기 위해 서울로 유학길에 오르지만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휘말린다. 이제 전홍은 무대에 부재한다. 연극 무대는 구명운동의 이야기로 전환한다. 서울에서 함께 유학하고 있던 전홍의 사촌인 마리가 돌아와 펼치는 구명운동의 서사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세대를 이어 지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전홍과 마리는 분단체제에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에 속한다. "한국에서도 못 살고 고향에서도 낯설고"라는 마리의 대사에서는 분리의 경계선이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경계선에는 사라진 이카이노가 여전히 끈끈하게 달라붙어 떨치기 힘겨운 무게를 담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경계가 분명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망명 서사는 떠남과 도착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며, 동화와 소외가 그 중심 주제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근현대사에서 이주와 정주 사이, 고향과 타향 사이에서 정체성의 물음 앞에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사라졌을까. 연극 '이카이노의 눈'은 영춘과 전홍을 통해 그들이 속한 시간의 문법 안에서 떠남과 도착, 동화와 소외의 이야기를 펼친 것이다. 이제 관객인 우리가 연극이 시작할 때 영춘이 읽었던 그 비망록에 이어 쓰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까지 드러난 기록에 대항하거나 덧붙여야 하는 이야기는 과연 더 없는지 말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