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작가 기리는 문학상 받은자가
최종 심사위원 포함 타당성 쟁점화
'상장을 접어…' 기형도 시구 떠올라
저마다 삶의 방편이 필요하겠지만
작가라면 세속 초월 도도한 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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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대구방송에서 주최한 제17회 이육사詩문학상이 논란이다.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가 최종 심사위원에 포함되었던바, 그게 과연 타당한가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팔봉 김기진은 친일작가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러니까 친일작가를 기리는 문학상 수상자에게 항일저항시인 이육사의 이름과 정신으로 수행되는 문학상 심사를 맡긴 것은 잘못된 처사라는 항의가 비판의 요지라 하겠다.

논란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기형도의 시구가 떠올랐다.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위험한 家系' 1969) 우리네 삶이란 개천을 떠내려가는 종이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위태로운 여정의 끝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명예나 권력, 부 따위도 이러한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작가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라면 이는 삶이 발 딛고 있는 죽음의 지반을 끌어안은 경지에서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상장을 접어 종이배로 띄울 수는 없다. 어쨌거나 살아가는 동안에는 삶을 이어나가는 나름의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장을 저 멀리 흘려보내고 어떤 상장을 겸허하게 두 손으로 받아들 것인가. 존재의 심연에 비추었을 때 삶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형성하게 되는가가 판단 근거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무의 영역으로 수렴하겠지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한다면 받아들이고, 어지러운 욕망의 자극에 불과하다면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심연과 맞대면하고 있는 자는 마땅히 그 정도의 자존심이랄까 오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그러한 유의 오기를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육사詩문학상 논란의 경우에는 민족의식이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는데 아무리 견고한 민족의식을 구축했다고 한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면 손가락질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대로 젠더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작가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후보로 올라 비난 받는 경우도 보았다. 거대언론과의 관계 설정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언론 개혁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인바, 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작가는 치켜드는 명예욕을 지긋이 내리누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판자본의 책임 및 횡포에는 어찌 대응할 것인가.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 기준은 무한정 늘어나게 된다.

다양한 기준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젠더 문제에 눈 감은 민족의식이나, 친일 잔재 청산에 둔감한 성 평등주의는 각자 자신의 목소리만 높일 뿐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다. 자신의 잣대와 다른 기준은 부차적인 사항에 불과하며 부차적인 논점으로 핵심 논점을 흐리거나 대체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떻게 모든 기준을 동시에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존재의 심연을 끌어안은 지점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할 도리 이외에는 없다. 세속의 명예, 부, 권력 따위를 도도하게 내려다보는 결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빚어진다.

우리 작가들에게는 스스로를 헌신하면서 폭압적인 권력과 맞서 싸워왔던 전통이 있다. 고문과 투옥을 당하면서도 이 나라 민주화에 적극 나섰던 작가들의 구심체 한국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작가들은 그러한 전통을 이어나가되 존재의 심연이라는 지평에서 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까지 수행하는 지점에 자리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변화된 시대와 함께 하는 길이다. 세속 어떠한 상장의 권위·명예보다 드높은 곳에 군림하며 호기롭게 제 세계를 드러내는 작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한 작가들의 비중이 한국문학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