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를 시도해도 회복이 쉽지않다
서로 잘못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용서 차원서 상대방 생각하기 때문
미워할 바엔 곁에 두고 사는 지혜를
한번 척을 지게 되면 나중에 화해를 시도한다 해도 관계가 회복되는 예가 거의 없습니다. '잘못은 상대에게 있고 나는 용서하려는 차원에서 손을 내미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잘못도 있다고 인정한다 해도 거기에는 이런저런 변명이 붙습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상대가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지적을 하면 화해하려는 마음은 더 큰 분노로 바뀝니다.
일전에 미술인들과 미술 시장 활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의 낙후된 어느 지역에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재건축을 진행한지 15년이 되도록 진전이 안 돼 곧 계획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흉가나 다름없이 방치되어 있었지요. 만일 미술인들이 이 헌 아파트를 싼값에 한 채씩 매입한다면 더 이상 젠트리피케이션에 위협받지 않는 것은 물론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합을 만들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신나게 이런저런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재건축 조합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서 우리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에 앞장섰던 저와 집행부는 마치 사기꾼처럼 몰려 비난을 받았지요. "천주교 신부여서 믿고 함께했는데 이게 뭐냐! 신부도 사기 치냐!"
소액이지만 십시일반 부담했던 조합 회비를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는 이도 있었습니다. 운영비 한 푼 받기는커녕 오히려 쌈짓돈 털어 기부까지 했는데 결국 인연이 끊긴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어언 10여 년. 돌이켜보면 여전히 속이 상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에서 그래도 관계를 회복해야겠다 싶어 인연이 끊긴 이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냉대로 마음만 혼란해질 뿐 마음이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밀 이삭을 심었는데 가라지 싹이 보이네요. 우리가 가라지들의 싹을 잘라버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놔두어라. 지금 가라지 싹을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 수 있다. 그러니 추수 때에 가라지와 밀이 선명히 드러나면 가라지를 뿌리째 뽑아 불에 태워버려라"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선한 이와 악한 이가 함께 살고 있는데 악한 이는 종말에 가서 내가 심판할 테니 너희는 남을 심판하려들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빗댄 것입니다.
원수져 싸울 때 보면 어느 한 쪽이 옳은 듯 보여도 서로 잘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저이가 옳고 또 어느 측면에서 보면 그이가 옳습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상황까지 결부되면 시시비비를 가리기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갈등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밀이고 상대는 가라지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가라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를 적으로 두고 심판하는 건 내 인생의 폭을 좁게 만들 뿐입니다. 결국 답답하고 화가 나는 건 자기 자신뿐입니다.
원수는 나의 운명입니다. 피하려 해도 원수 없이 살 수는 없는 게 인생사입니다. 보지 않고 멀리 지내도 기억에 남아 수시로 마음에 상처를 냅니다. 멀리 보내려 하면 할수록 그는 끈질기게 나를 찾아옵니다. 그럴 바에야 미워하면서 괴로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곁에 두고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하고 그를 풀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