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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제임스 본드 영향이 컸다. '스파이(spy)' 하면 낭만이 풍긴다. 잘생긴 얼굴에 세련된 매너. 여기에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아낌없이 돈을 뿌리는 여유까지.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스파이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냉전시대 미국 CIA와 소련 KGB 스파이의 주된 활동은 군사·외교에 관한 정보수집이었다. 소련 붕괴 후 중국이 강자로 떠오르자 산업경쟁력이 중요해졌다. 첨단 기술 보호가 국가 안보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정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인다. 첨단 기술 정보 자체가 엄청난 자산이기 때문이다. 국가나 기업은 상대 국가와 경쟁 회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수많은 산업 스파이들이 세계 각국에서 암약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 기밀 도난으로 입는 손실은 천문학적이라 계산조차 하기 힘들다. 세계 최고인 우리의 반도체 기술 역시 스파이의 주요 타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중국을 군사경제의 적으로 간주해 왔다. 집권 후엔 "중국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기술을 빼내기 위해 온갖 스파이 짓을 하는 적"이라며 '시노포비아 (sinophobia·중국공포증)'를 확산시켰다. 본인이 직접 미·중 무역전쟁을 주도하고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해 규제를 강화해 양국 간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물론 트럼프의 이런 행동에 중국정부와 화웨이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휴스턴에는 미 항공우주국 우주센터(NASA)와 바이오 등 첨단 연구소들이 집중돼 산업스파이가 가장 많이 암약했던 곳이다. 미국은 휴스턴 총영사관을 중국 공산당의 거대한 스파이 센터로 의심해 왔다. 그렇다고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인 수교를 한 1979년 개설된 최초의 주미 총영사관을 하루아침에 폐쇄한 건 충격이다.

하지만 중국도 곧바로 청두 미 영사관을 폐쇄했다. 분위기가 영 꺼림직하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며칠 전 연설에서 중국을 '중국 공산당'으로 표현하고 '세계 패권 장악에 나선 새로운 전체주의 독재 국가'라고 말한 것도 그렇다. 분위기가 스파이 전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어찌 됐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이 아닌지 예의 주시할 때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