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불가 영역이 있다면 산책 꼽아
애완견이 길동무라면 더 없는 축복
문제는 동물을 꺼리는 사람과 갈등
공존을 위해선 '펫티켓지키기' 필수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디지털 중심으로 바뀐다 해도, 온라인이 아무리 정교하게 오프라인을 대체해 나간다 해도 대체 불가능한 영역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중의 하나가 산책 아닐까? 산책은 오프라인, 즉 대자연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풋풋한 풀향기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위대한 선물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오솔길 산책의 즐거움은 온라인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비가 자주 내리는 장마철, 모처럼 갠 날 오후 산책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감을 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이슬 머금은 숲속 오솔길 산책은 너무나 좋다. 게다가 필자의 경우는 산책길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말없이 옆에서 길동무를 해주는 귀여운 강아지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축복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기분 좋은 산책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 바로 치우지 않은 강아지 배설물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 중인 사람으로서 부끄러워 몸 둘바를 모를 지경이다. 옆 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아니 누가 이렇게 안 치우고 간거야"라며 죄없는 필자의 강아지를 향해 읊조린다. 실은 "우리 개는 범인이 아니에요"라고 변명을 하는 셈이다. 매번 묻지도 않는데 혼자 중얼거리기도 멋쩍어서 최근에는 아예 개 목줄에 눈에 잘 띄는 형광색 배변 봉투를 매달고 다닌다. "제 반려동물의 변은 반드시 치우는 사람"이라고 옹색한 표시를 하는 것이다.
동물을 달가워하지 않는 누군가와 부딪힘 없이 기분 좋은 산책을 마치려면 책임이 수반된다. 필자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산책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개가 그저 공포의 대상이고 기피의 대상일 수 있다. 애견 1천만 시대라고 하는데 이 숫자의 증가만큼이나 문제점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반려견 때문에 이웃 간에 크고 작은 다툼 발생은 뉴스거리도 아닐 만큼 흔한 일이다. 애견인들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챙겨야 할 일이 참 많다. 동물 병원비는 왜 그리 비싼지, 사람 치료보다 더 먹힌다. 미용 비용도 만만치 않다. 사랑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참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녀석들이 건네는 행복감은 그 이상의 노고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게 된다.
어디 이뿐인가? 필자의 강아지는 천둥벼락이 치는 소리에는 꿈쩍 않지만, 냉장고 문을 여는 작은 소리에는 꿀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체중 증가는 안 된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나는 먹고 싶거든요"라는 애절한 눈빛 애교에 감량 계획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가족들의 타박은 고스란히 마음 약한 필자 몫이 되고 있다. 외식이라도 하고 온 날에는 킁킁검사를 해대는 통에 비만견 속사정은 아랑곳없이 먹다 남은 갈비뼈를 몰래 챙겨다 준다. 자책과 후회는 늘 필자 몫이지만, 세상없이 행복하게 먹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 더 큰 행복감이 밀려온다. 참 많은 순간, 위로받는다. 문제는 필자에게는 이렇게 기쁨을 주는 존재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동물을 꺼려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 모두 우리 사회 구성원이다. 갈등 없는 공존의 첫 번째 요건은 '펫티켓' 지키기다. 산책할 때 견주는 "우리 애는 순해요. 안 물어요" 대신에 안전한 길이의 목줄 매기는 물론 배변 수거 등 소소한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펫문화가 바로 서야 평화로운 공존도 가능하다. 바람직한 펫문화 정착 속에 당당하고 기분 좋은 산책을 기대 해본다.
/김정순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언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