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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리그는 대한민국 스포츠의 전환점이다. MBC 청룡 이종두 선수의 개막전 역전홈런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군사정부의 우민화 정책이란 비판에도 관중이 몰렸고, 프로스포츠 시대를 활짝 열었다. 실업야구 수준인 첫해에는 믿지 못할 기록이 쏟아졌다. 백인천 감독 겸 선수의 타율 4할2푼1리는 여전히 경이롭다. 홈런 타자 김봉연에, 투·타 겸업 오리궁뎅이 김성한까지. 시합이 진행되는 시간엔 짜장면 배달이 멈췄다고 당시 언론은 전한다.

모두가 즐겁지는 않았다. 꼴찌팀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극성 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첫 희생양은 삼미슈퍼스타즈였다. 연패가 이어지자 구단은 박현식 감독을 경질하고 김진영 감독으로 교체했다. 그 해 15승68패를 기록한 삼미는 다음 해 믿기 힘든 반전에 성공한다.

일본에서 온 '너구리' 장명부는 현란한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30승을 거뒀다. 임호균 투수가 12승을 보태 그해 56승 가운데 47승을 합작했다. 전반기 2위, 후반기 2위에 올랐다. 김진영 감독은 청룡과 경기에서 격하게 항의하다 구속됐다. 프로야구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슈퍼스타의 위용은 그해뿐이었다. 이듬해 다시 꼴찌팀이 됐고, 구단은 매각됐다. 5시즌 통산 1승을 거둔 비운의 투수 감사용은 드라마 주인공이 됐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다. 삼미는 청보 핀토스가 됐고, 태평양 돌핀스로 진화했다. 연고지를 떠나버린 수원 유니콘스와 목동 돔구장 히어로즈는 후계로 보지 않는다. 슈퍼스타가 얼룩말로 변신하면서 김 감독은 물러났다. 1990년 롯데 자이언츠 지휘봉을 잡았지만, 그해 8월 성적 부진으로 물러났다. 야구 영웅은 이후 그라운드를 밟지 않았다.

지난 3일 김 감독이 미국 플로리다 자택에서 별세했다. 1935년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인천고를 3번이나 우승시켰다. 국가대표 유격수를 지낸 인천이 낳은 최고 야구스타였다. 감독직을 물러난 뒤 미국으로 떠났다. 고인의 아들은 '미스터 인천' 김경기 선수다. 아버지보다 한 뼘 더 큰 키와 덩치로 태평양 돌핀스 타선을 이끌었다. 현재는 공중파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한다. DNA의 대물림이다.

김 위원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한다. 코로나19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별을 잃었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