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풀잎 위에 누워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 귀밑머리에 매달린 하얀 박쥐들을 떼어냈고요 우리의 책은 폭설을 쏟아내고 있었지요 마른 혀도 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입 속으로 들어왔어요
당신은 은어 떼 헤엄치는 수박 향기로 반짝였지요 당신이 흘러든 풀섶에서 유혈목이가 기어 나와 내 품을 파고들었어요 책장엔 진달래꽃 피어났고요 알몸을 포갠 우리는 따뜻한 무덤이 되어갔지요
이병철(1984~)
사실상 한 권의 책은 저자가 발견한 그 무엇을 나름대로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운명적인 저자와의 만남은 독자를 통해 읽혀지고 자각되며 새롭게 태어난다는 관점에서 재현되는 에센스의 발견이며 사건이다. 책장에 그러한 책이 쌓여갔다는 것은 매번 다시 태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책의 미혹에 언제든지 빠져들게 하는 증거물인 것. 그러한 사유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혈목이의 책장'에는 당신을 인식의 풀잎 위에 눕혀 놓고, 생각을 떨어뜨리며, 기억을 떼어낸 지난날들. 여기에 다른 인식을 쏟아내며 주입하고 있는, 이른바 미지수의 n차 감염인 것. 마치 그것을 '따뜻한 무덤'이라고 믿는 당신에게 꽃뱀의 '마른 혀'가 '언어의 풀섶'에서 당신의 가슴을 노리듯이. 그러나 없어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듯이 그러한 '대지의 책장엔' 알면 알수록 당신의 봄을 기다려온 '진달래꽃'이 만발해 있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