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희수 집에 기거하며 극진히 섬겨
학문 게을리하자 모친에 하직인사
장원급제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
훗날 금산군수 부임케해 행복한 삶
병들어 짐 될까 자진하기전 詩 남겨
심희수(1548~1622)는 과거급제 다음 여러 관직을 섭렵한 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1606년 그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의 성공가도 뒤에는 그날 밤의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열다섯이던 심희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타홍을 기다렸다. 날이 저물자 그녀가 대문을 들어섰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녀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일타홍은 심희수의 모친에게 큰절을 올리고 찾아뵙게 된 연유를 말했다.
금산에서 온 일타홍이라는 기생이며 오늘 낮 어느 연회장에서 도련님의 관상을 뵙게 되었는데 장차 큰 인물이 되실 상이었다는 것과 비록 비천한 기생이나 힘을 다해 도련님을 학문의 길로 나가게 해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급제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것과 한 집에서 기거를 하더라도 정분을 나누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심희수 모친은 자식이 방탕한 생활로 속을 끓이던 터였고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어 기꺼이 허락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심희수는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나이 들며 친구들과 기방에서 술 마시고 놀기에 바빴던 것이다. 어머니의 훈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심희수의 태도가 달라졌다. 마음을 바로 잡고 학문에 정진했다. 일타홍은 모아둔 패물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심희수의 결심은 자주 흔들려 밖으로 나돌기가 여러 번이었으나 그때마다 그녀의 설득으로 책을 펴들었다. 혼기에 이른 심희수에게 노극신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게 하고 극진하게 섬겼다.
다시 심희수의 학문하는 태도가 불성실해지는 모습을 본 일타홍은 심희수의 모친에게 떠나겠다고 하직 인사를 했다. 놀란 모친이 극구 말렸으나 그 길만이 도련님을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떠나며, 도련님이 다시 마음을 잡아 학문에 매진하시어 장원급제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거나하게 취해서 귀가한 심희수는 일타홍이 집을 떠나며 남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 그는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를 끊고 공부에만 열중해서 23세인 1570년 진사시험에, 1572년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일타홍에게는 두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읊은 '장마'와 그녀의 절명시 '달을 보며'가 그것이다. '열흘 긴 장마 개일 기색 없는데/고향 그리워 꿈결에 달려갔다 놀라 깨이네./옛 동네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길은 먼 천리/솟은 난간에 팔 괴고 가만히 고향 가는 길 헤아려보네'가 고향 금산을 향한 회한이 서린 시다. 절명시 '달을 보며'는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라는 가슴 아픈 시다. 심희수를 설득하여 고향 금산군수로 부임케 하고 나서 부모님을 뵙고 몇 달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병이 깊어 낭군의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진하기 전에 쓴, 지극한 슬픔의 시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을 싣고 한양으로 향했다. 그녀를 실은 배가 금강을 건널 때 비가 내렸다. 그 때의 심정을 만장시 '이별의 눈물'로 쓰며 그는 오열했다. '한 떨기 연꽃 상여수레에 실려 있는데/향기로운 영혼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금강 봄비에 붉은 명정 젖어드니/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로 끝맺는 시는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