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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들이 손사래 치는 대화 주제가 군대와 축구다. 그러니 군대 가서 축구한 얘기라면 질색하는 게 당연하다. 공감할 수 없는 대화에 꼼짝없이 갇히는 일 만한 고역이 없어서다. 연애 초반 군대 가서 축구한 추억을 더듬는 남성은 퇴짜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 남성들이 여성들의 구박을 무릅쓰고 평생 군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건, '군 복무' 경험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다. 징병제로 강제되는 병역의무는 청년들에게 경력단절과 사회적 격리를 강요한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맞는 두려운 공백이다. 남성이면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연대감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공백이다. 남성들이 군대에서 누가 누가 더 힘들었나 무용담 경연을 펼치는 건 '공백'을 채우기 위한 자기 보상심리의 발동일 것이다. '뻥'인 줄 알면서 '뻥'으로 받아치며 넘어가는 이유다.

현역 복무기간이 짧아진 지금은 옛날 얘기가 됐지만, 386세대들은 현역 복무기간에 따라 신의 아들(병역면제자), 장군의 아들(6개월 방위), 사람의 아들(18개월 방위), 어둠의 자식(현역 복무)으로 스스로를 구분했더랬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부담이다. 병역의 형평성을 무너뜨린 '특혜자'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이유다.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 서모씨의 휴가미복귀 의혹 사건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1월 야당의 고발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8개월째 결과가 없는 가운데, 야당의원이 '추미애 의원' 보좌관의 병가연장 청탁 전화를 증언하는 녹취록을 공개하면서다. 1차 병가 후 복귀하지 않았다는 당직 사병의 기억만큼 중요한 증언이다. 서씨는 21개월 복무기간 중 19일을 병가로 썼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휴가 명령서가 없다"면서도 "행정상의 오류"라고 답했다.

'휴가명령서 없는 휴가'라니. 군대를 다녀 온 대한민국 남성들은 이런 휴가는 없다는 걸 다 안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 말대로 "병역 문제가 역린의 문제"인 이유는 서툰 변명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 절반이 남성이고, 이중 30대 이상은 거의 군 복무자였다. 추 장관 아들의 병가가 특혜인지 아닌지는 이미 여론 속에서 판가름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검찰수사가 더딜수록 여론은 민감해질 테고, 병영에선 서씨 수준의 병가 신청이 봇물을 이루고, 청와대엔 병가 상소문이 오를지 모른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