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전자책 내리 몇권 읽게 돼
책장 넘긴답시고 손가락에 침 발라
신기하게도 글씨크기 맘대로 조절
훗날 1인용 안락의자에 등 파묻고
아이패드로 책 읽는 할머니 될테지
요즘은 미니멀리즘이 대세라는데 나는 트렌드 따라 흉내라도 좀 내 보고 싶어도 이고 지고 살아야 하는 책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전자책 안 봐요?" 사람들이 물으면 "무슨. 책은 종이 넘기는 맛인데." 그렇게 대답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전자책을 내리 몇 권 읽게 되었다. 아이패드를 사용해서 읽는데, 나는 책장을 넘긴답시고 자꾸 손가락에 침을 발랐다. 그러고는 혼자 웃었다. 촌스러워도 보통 촌스러운 게 아니군. 그런데 그만 내가 전자책에 홀랑 빠지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유는, 노안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선배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
"난 이제 낭독회 초대받는 것도 거절해."
"왜요?"
"작가가 자기 책 낭독하면서 돋보기 주섬주섬 꺼내는 거 너무 웃기잖아."
사실 좀 놀랐는데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 선배가 뭘 돋보기까지 필요한 정도인가, 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노안 따위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스마트폰 보는 일이 힘들어지고 폰트가 유난히 작은 책을 펼치면 비명부터 나왔다. 급기야 안경원엘 들렀는데 노안 초기라는 안경사의 말에 "초기죠? 초기 맞죠? 아직 중기까지는 아닌 거죠?" 그런 소리만 하고 돌아왔다. 가방 속에 돋보기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여자가 되기에는 아직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참, 그게 뭐라고.
그러다가 전자책을 보게 되었는데 맙소사, 이 신기한 전자책은 글씨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거였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어느 출판사에서는 노안 독자를 위해 큰글자 책을 낸다지만 나는 그런 책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전자책은 책장에 꽂아두지도 않는 것, 내가 글씨를 크게 해서 본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신세계를 이제 알게 되어서 나는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이젠 전자책으로 먼저 고른다. 없으면 말고. 전자책 정기구독 서비스도 신청했다. "엄마, 또 카톡해?" 태블릿을 들고 있는 내게 딸아이가 물으면 "엄마 책 읽거든!"하고 으스댄다. 나는 훗날 1인용 안락의자에 등을 깊이 파묻고 앉아 아이패드로 책을 읽는 할머니가 되겠지. 그러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늙어도 예쁜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아이가 또 마음을 찌른다. "엄마는 염색해서 머리가 까만 거라면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염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아빠가 그랬어. 엄마도 흰머리 있는데 염색해서 안 보이는 거라고." 아니, 뭘 그런 걸 일러주나 몰라. 젊은 엄마인 척한 적은 없지만 굳이 네 엄마 나이 들었단다, 자랑할 일은 아니어서 몰래몰래 했는데.
냉동만두 포장지에 쓰인 조리법이 안 보여서 친구 앞에서 신경질을 부렸더니 친구가 심드렁하게 팁을 하나 알려준다.
"폰으로 사진 찍어. 그다음에 손가락으로 확대해서 보면 되잖아."
세상에나, 나는 그렇게 리빙포인트를 하나 습득한다. 돋보기가 없어도 나이 안 든 척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쓱쓱 확대하면서 신이 나서 웃었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