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황보출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슴에 있는 말을 나는 못한다. 그래서 입이 쓰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내 말을 하겠다. 가슴에 있는 말을 하겠다." 2016년, 황보출은 시집 '가자 뒷다리'(도서출판 돋보기)를 간행한다. 연극 '화전가'를 보면서 황보출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 빛깔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6일부터 1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화전가'(극작·배삼식 극작, 연출·이성열) 공연(2월28일 초연 예정이었으나 8월6일 초연, 23일까지 공연 예정이었으나 18일까지만 진행)이 있었다. 1950년 4월의 경북 안동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극 '화전가'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그 독특함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전략으로 생략과 부재의 기법을 활용한 결과로 보인다.
거대 사건이 없다. 작품의 제목과 달리 화전놀이가 펼쳐지지도 않는다. 환갑을 맞은 김씨를 찾아온 식구들이 밤을 새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시대극에 나올 법한 거대 서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쟁 두 달 전으로 설정한 배경이 사건을 촉발하는 힘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극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중심 사건을 만들지 않는 이 전략으로 인해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과 삶에 특별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거대 서사를 중심으로만 삶이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남성이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홉 명은 모두 여성이다. 중심인물 김씨, 딸 셋(금실이, 박실이, 봉아), 며느리 둘(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씨, 독골할매와 그의 딸인 홍다리댁,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은 20여 년 넘게 소식이 없다. 장남은 4년 전 병으로 죽고 차남은 감옥에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남성 부재의 인물 설정은 거대 서사의 생략과 함께 이 작품이 소소한 이야기만으로도 극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
잔칫날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쏟아지게 되어 있다. 보통이라면 그 시간이 무르익을 무렵 사건이 터진다. 떨어져 있던 시간의 두께만큼 이야기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묻어두었던 사연이 폭발하여 큰 사달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화전가'는 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한 사건 다음에 이어질 다음 사건을 궁금하게 하는 전략이 아니라 한 인물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 인물을 궁금하게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저마다의 시간을 소소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밤은 이야기의 시간이다. 낮이 물러가고 밤의 시간이 열리자 속내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하지만 '화전가'는 이야기가 모이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시간은 어느 한 인물에게 집중하거나 어느 한 사건으로 정점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자신의 리듬과 호흡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 밤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김씨의 환갑잔치를 위해 딸들이 친정으로 오면서 시작한 연극은 그들이 돌아가면서 끝난다. 화전놀이나 화전가 한 번 부르지 않고 끝난 연극의 제목을 화전가라고 한 까닭을 물어야 하는 것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홉 명의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하라는 표지일지도 모른다. 저만치 떨어진 산중을 가리키며, "무슨 빛깔이노"라며 김씨가 제안했던 화전놀이는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이야기의 시간인 밤 내내 흘려보낸 그 속내가 저마다의 색깔로 만든 화전가일지 모른다.
그것은 "많은 언어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마치 색색의 꽃들로 가득 찬 들판 같아야 한다. 색깔, 혹은 모양 때문에 한층 더 꽃다운 꽃은 없다"고 응구기와 시옹오가 말한 것처럼, 이 세계가 단일한 하나의 고정된 중심으로만 돌아간다고 믿는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빛깔일지 모른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