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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셰인'(Shane). 떠돌이 총잡이 셰인은 개척민 농가에서 하룻밤 신세 지는 바람에 악당의 무리와 맞선다. 개척민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목축업자와 그가 고용한 총잡이들을 한 자루 총으로 처리한 뒤, 부상당한 몸을 말에 싣고 쓸쓸하게 떠난다. 지금이라면 그는 떠나는 것으로 용서받을 수 없다. 살인죄로 기소돼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가려야 한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개인 및 단체가 사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사적제재(린치)는 금지된다. 개인이나 집단이 법을 초월해 형벌을 집행하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야만적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건맨과 협객이 악당들을 처단하는 서부영화와 무협영화의 정의는 픽션에 머물러야 한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몽둥이로 살해한 택시기사 박기서가 법의 심판을 받고, 아들을 폭행한 가해자를 사적으로 폭행한 한화 김승연 회장이 구속돼 법정에 선 이유다.

지난 6월 개설된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가 사적제재 논란에 올랐다. 디지털 교도소는 "대한민국의 악성 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끼고, 이들의 신상정보를 직접 공개하여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하려 한다"고 사이트 개설 목적을 밝혔다. 고 최숙현 선수가 지목한 가해자들과, 세계 최대 아동 성범죄 영상 유포자 손정우 등의 신상정보가 공개돼있다. 신상정보 기간은 30년이라니, 여기에 오르면 사실상 사회적 종신형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디지털 교도소가 지인의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하는 '지인 능욕'을 사주한 혐의로 신상을 공개했던 고려대 학생 A씨가 결백을 주장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범죄사실을 부정하고 신상정보를 해킹당했다고 주장했다는데, 디지털 교도소는 그의 신상을 계속 공개했다고 한다. A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교도소는 사회적 심판자가 아닌 가해자일 뿐이다. 경찰은 A씨 주장의 진위를 밝히고, 그와 상관없이 '디지털 교도소'에 대해 추적에 나서야 한다.

디지털 교도소는 '법의 정의(正義)'가 의심받는 사회의 위기를 보여준다. 성범죄에 관대한 판결이 디지털 교도소에게 명분을 주었다. 법의 정의를 의심받아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된 검찰 수사와 법원의 판결은 성범죄 분야뿐이 아니다. 또 다른 '디지털 교도소'의 출현이 걱정되는 시절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