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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19세기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런던은 암울했다. 썩어버린 템스 강의 악취로 강변의 국회의사당은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해 마다 창궐하는 콜레라였다. 전염병의 원인을 나쁜 공기로 단정했던 의학계로선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1854년 존 스노우라는 의사가 콜레라 발병자와 사망자들이 특정 지역 식수 펌프를 중심으로 집중된 사실을 발견한다.

전염병 역학조사인 펌프 지도를 작성한 스노우는 최초의 방역행정가인 셈이다. 로베르트 코흐가 1883년 콜레라균을 발견했으니, 스노우는 병원균의 정체마저 모른 채, 오직 발병자 역학조사만으로 집단감염원을 차단한 것이다.

어제 국무회의에서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질병관리본부를 독립기관인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키고, 문재인 대통령은 초대 청장에 정은경 현 질병관리본부장을 내정했다. 질병관리청은 12일 공식 출범한다. 중앙보건원(1959년)-국립보건연구원(1966년)-국립보건원(1981년)을 거쳐 2003년 사스 발생을 계기로 2004년 질병관리본부로 확대됐지만 복지 부처 산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그러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독립해 방역행정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코로나19 2차 대유행이 한창이니 질병관리청과 정은경 초대 청장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현 정부는 전 세계에 K-방역의 우수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실제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당국자들이 지난 3월 질병관리본부를 방문해 우리나라 코로나19 대응 시스템을 벤치마킹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구 1차 대유행에 이어 현재 수도권 2차 대유행이 증명하듯 방역은 작은 틈만으로도 무너진다. 중국 공산당은 코로나19 종식을 공식 선언했지만, 공산당이라서 가능한 배짱으로 봐야 한다.

정 본부장은 지난 6월 코로나19 집단감염과 대유행을 예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을 소비 전선에 내몰았다. 이제 정 청장 내정자는 독립기관의 장으로서 경고의 메시지를 확실하고 단호하게 밝혀야 하고,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질병관리청의 방역지휘에 따라야 한다.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목숨 걸고 전염병 발생 경로를 샅샅이 누빈 스노우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조사 결과가 런던 시민의 목숨을 구했다. 정치가 정 청장의 방역 신념을 존중하기 바란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