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 유엔군 산하 8개국 261척의 함대가 월미도 북한군 진지를 향해 일제히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거의 미군 함정이었지만 손원일 제독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해군함정 15척과 해병대도 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주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북한군은 급조한 서해안방어사령부로 방어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지휘한 이날의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유엔군은 북진한다. 한국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팔미도 등대는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무모하면서도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서해에서 월미도와 인천항으로 진입하려면 무의도와 팔미도 사이의 해로를 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팔미도 등대가 아니면 칠흑 같은 밤바다를 수백척의 함대가 이동할 수 없고, 새벽 기습작전도 가능하지 않았다. 유엔군 사령부가 켈로(KLO)부대의 한·미 특공대원 6명에게 15일 0시 팔미도 등대 점등을 명령한 이유다. 등대는 14일 저녁 11시45분 불을 밝혔고, 유엔군 함대는 줄지어 월미도로 향했다.
팔미도 등대는 대한제국이 1903년 6월1일 점등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출범한 대한제국이 근대 건축기술로 지은 최초의 콘크리트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름 2m, 높이 7.9m로 초라한 규모다.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에 나라를 잃었지만, 팔미도 등대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셈이니 작은 등대가 간직한 역사적 의미가 묵직하다.
문화재청이 지난 15일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7호로 지정했다. "6·25전쟁 당시 수도 탈환의 성공적 발판으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연합군 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이바지한 역사·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70주년, 정부가 주도한 기념식은 없었다. 해군이 주최한 전승기념행사도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대한민국을 존립시킨 결정적 전투였음을 생각하면 어색하다. 인천상륙작전 7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팔미도 등대를 사적으로 지정한 문화재청의 배려가 돋보이는 이유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