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인류. 유일한 희망은 미 해군 이지스 구축함인 '네이단 제임스'호다. 함정엔 북극에서 채취한 바이러스 원형으로 백신을 만들 수 있는 여성 과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영화채널에서 재방송 중인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쉽'의 내용이다. 드라마에서 기관고장으로 함정의 전원이 나가자 비상이 걸린다. 함정 내에서 개발 중인 백신 샘플들이 온도가 올라가면서 사멸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백신을 수온 5도인 깊은 바다에 담가 위기를 모면한다.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 접종을 시작한 이래 백신은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천연두는 이제 박멸됐다. 소아마비, 홍역, 장티푸스, 콜레라, 뇌수막염 등 수 많은 전염병 바이러스는 백신 앞에 맥을 못 춘다. 이런 백신도 약점이 있다. 상온에만 노출돼도 효과가 사라진다. 물 백신이 되는 것이다. 가축 전염병인 구제역 백신과 관련 '물 백신' 논란이 일었을 때, 수입 백신의 효능이 도마에 올랐지만 접종 과정에서 백신을 상온에 장시간 노출시킨 관리 부실도 원인으로 거론된 바 있다.
올해는 유난히 독감 백신 접종이 중요해졌다.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창궐하는 트윈데믹이 발생하면, 증상이 비슷한 두 질병을 감별하느라 의료체계가 붕괴되면서 백신 없는 코로나19 희생자가 늘어날 수 있어서다. 통신비 지원 대신 전 국민 독감 백신 무료접종 주장에 여론이 호응한 이유다. 정부·여당이 4차 추경에서 통신비 지원을 줄이고 취약계층 105만명의 무료접종 예산을 편성한 배경이다.
그런데 정작 독감 백신이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되는 바람에 국가 무료 접종 사업이 중단됐다. 백신 박스들이 가을 햇살에 달궈진 땅바닥에 쌓여 유통됐다는 제보에 질병관리청이 해당 백신 접종 중단을 결정한 것이다. 질병관리청은 500만명 접종 분량의 백신을 검수 중이다. 하지만 이미 접종을 완료한 백신들은 문제가 없단다. 백신 유통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관행이 있을 것이다. 상온 유통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미 예방접종을 마친 국민에 대한 백신 유효성을 검사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엄청난 예산이 소비되고 있다. 독감 백신 무료접종도 코로나19 예방차원의 사업이다. 국민 혈세가 기껏 백신 박스 배달 사고로 물거품이 된다면 너무 허망하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