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4차산업혁명이 가져온 공허
피카소가 그린 폐허의 회색과 닮아
취업문제, 삶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더 이상 경쟁시장에만 맡기면 안돼
그러나 회색분자라는 평가보다 더 와 닿는 것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성에 있다. 사실 직장이라는 제도권에 속하지 못한 채 실업상태에 있다는 것은 정신적 피폐를 넘어 처참한 생활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회색은 분노와 파괴를 내재한 색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면접까지 온 수험생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가득하다. 만약 이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 희망은 있을까. 다시 회색지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스며있다. 준비한 답변을 다 못해서일까. 파르르 떠는 손끝을 애써 외면한다. 이럴 때마다 면접관이라는 자리가 불편해진다.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에서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40대가 되면 떠밀려 전직을 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20년 전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군인도 예외가 아니다. 장군이 되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그러나 계급정년 앞에 그도 다시 취업 시장에 내몰렸다. 자식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이를 악물고 있는 다른 퇴직자들처럼 황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휘관으로 혹은 대기업의 부장으로 자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수 백번 원서를 내도 면접을 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에 비하면 추억이라도 있다. 취업 시즌이지만 코로나19로 취업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직업이라는 시장 자체에 진입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전관의 이름으로 수십억원의 수입을 거둔 변호사들도 있었다. 의료계의 정당성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업과 의사고시 거부가 진입 저지에 의한 기득권 수호로 비판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들이 공정과 세대 간 정의를 외치는지. 젊은이들의 분노를 직시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회색은 산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래의 희망이라는 제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 박탈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국가의 경제력은 수십 배 향상되었음에도 인간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일을 통해 성취하던 인생과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취직도 결혼도 할 수 없는 청년들의 현실. 자본주의에서 직업이 없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는 불길한 징표이다.
피카소(Picasso)는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독일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는 인간의 광기와 처참한 파괴 그리고 폐허를 회색으로 표현했다. 청년들의 취업절벽, 중년들의 시장 퇴출, 장년들의 빈곤, 노년의 질환과 질병.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우울과 공허 그리고 분노와 좌절들은 피카소의 회색과 다르지 않다. 형태만 다를 뿐 초국가적 자본의 탐욕이 인간에게 새로운 좌절과 불안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유와 기회의 불평등은 사회적 변혁을 불러왔다. 마르크스주의도 파시즘도 극단적인 실업과 불평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시민사회로는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하고 싶은 일에 예산을 투입하는 제4지대를 구축해주는 전략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퇴직자를 위한 제5지대도 함께 구축해야 한다. 청년들의 창의성과 퇴직자들의 노하우가 발휘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국가나 기업의 시각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경제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시각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일과 직업이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취업을 경쟁의 시장에만 맡기거나 그것을 정당화할 때가 아니다.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