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싸움서 우린 가능성 발견
재난상황에 대한 윤리적 성찰 수행
사라마구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평범함의 소중함' 바로 보게 해줘
'눈 멂', '진정한 눈뜸' 불가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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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사람들은 평범했던 지난날의 일상을 한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는 표정이나 많은 이들이 웅성거리면서 축제를 벌이고 응원을 하며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맞았던 시간들은 벌써 8개월째 지난 시대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이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유출 같은 사회적 재난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인간의 왜소함과 무력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역설적 지혜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제대로 된 성찰은 위기를 기회로, 난경(難境)을 지혜의 산실로 바꾸는 역리(逆理)의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지혜와 용기로 이 사태를 이겨나갈 가능성에 대해 신뢰를 보내면서도, 최근 경험한 공포와 초조가 어느새 평범함에 대한 간절함으로 바뀌어 가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한없는 겸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지 않았는가.

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는 살아 있는 것들의 욕망에 관한 극한의 드라마를 통해 무섭도록 생생한 감염병 리얼 판타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사라마구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기능공, 번역가, 기자 등을 거치면서 삶과 문장을 충실하게 배워갔다. 그는 가시적인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초자연적 요소까지 수용하는 상상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로 이미 유럽 사회에 유명세를 떨쳤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러한 그의 상상력이 구현해낸 극점의 섬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한 도시 대부분의 시민이 불가해한 이유로 집단 실명하면서 몰락해가는 과정은 영국 작가 존 윈덤이 쓴 SF 소설 '트리피드의 날'(1951)의 영향을 입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세계적으로 대규모 실명 사태가 일어나는 상황 설정이 사라마구의 작품에 암시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남자가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눈앞이 하얘지면서 눈이 머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를 만난 사람들도 연쇄적으로 실명하게 되고 어느새 집단 실명은 감염병이 되어 사람들에게 크나큰 존재론적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정부는 사람들을 격리하는 방식으로 전염 확산을 막는다. 이때 주인공인 의사 아내는 눈먼 남편을 위해 자신이 실명한 것으로 속이고 격리시설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녀는 군인들에 의한 살육과 악인들에 의한 약탈과 폭력이 얼룩진 세계를 목격한다. 육체의 질병은 어느새 정신과 영혼의 타락으로 몸을 바꾼 것이다. 그녀는 눈먼 사람들을 데리고 그곳을 탈출하여 돌아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먼 자들은 하나씩 시력을 회복하지만 정작 그녀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사는 끝이 난다.

이 탁월한 재난소설은 '눈멂'과 '눈뜸'의 의미를 역전시키면서 우리에게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와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평범함의 소중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눈 밝은 이들에게만 보이는 '위대한 축복'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전한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어느새 가을이 와버렸다. 정부와 의료진, 국민 모두가 선방한 덕으로 그나마 우리는 다른 국가에 비해 상황이 나은 편이다.

우리는 서구 제국이 얼마나 허약한 선진국이었는가를 알게 되었고, 새삼 우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한 객관적 사실에는 눈멀고 유튜브 가짜뉴스 같은 것에는 외진 눈을 뜨는 병리적 현상도 숱하게 목격했다.

이 청명한 가을에 우리는 '바로 본다는 것'의 합리적이고 균형적인 의미를 숙고해본다. 일찍이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이제 바로 보마"라고 했고, 랭보도 현상 너머를 볼 줄 아는 '견자(見者)'를 열망하지 않았는가.

재난 상황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수행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로 하여금 평범함의 소중함을 '바로 보게끔' 해준다. 이때 '눈멂'은 '눈뜸'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정한 눈뜸'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 될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