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 위기 임계점 가까웠다는 경고
언론·법조·지성인 작은목소리 듣고
사적이해·욕망 넘어 공동선 향해야
의미있는 목소리 낼때 '변화' 가능
위기를 경고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을 접하면 이런 위기가 가까웠다는 경고음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 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최근의 조선·중앙일보 등 주류 언론을 읽어보라.(별로 권하진 않지만) 곧바로 이 말을 수긍할 것이다. 위기를 경고하는 소리는 갈수록 커지는데 그 경고음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일까. 오히려 그 소리가 엉뚱하게 울리며 더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지는 않은가?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가진 공동체 의식 때문이다. 이 의식은 개인의 삶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선을 향한 마음이 함께 할 때 가능하다. 개인의 삶과 공동체는 대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상호작용하면서 나와 우리를, 개인과 사회를 정상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필연적 요소다. 지금 혼란을 부추기고 오직 자신이 지녔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 경고음을 울리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적인 집단 이익에 매몰된 이들이야 언제나 있었다. 다만 잘못된 사적 특권을 통제하고, 보다 나은 시민 사회를 만드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 가진 일상적 마음과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와 공동선이 함께할 때 가능한 덕목이다. 정상적인 사회는 이 두 요소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제도와 체계를 만들고, 법과 규범을 통해 이를 현실화하기에 가능하다. 이런 기능을 위해 언론과 법이, 지성인들이 특별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된 목소리를 내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경고음은 언론이 부추기는 선정적인 혐오와 분열 때문이지 않은가. 법이 사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공동선과 공공성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사회의 공적 자리를 독점하고 있다. 철 지난 특권을 당연시한다. 점점 더 사적 이해와 특권을 지키기 위해 거짓 경고음을 남발한다.
공적 위치를 점유한 그들이 이 권리를 남용한다. 자신이 누리는 그 권리가 사실은 사회가 부여한 공동선을 위한 책임 때문임을 애써 외면한다. 자신이 가진 한 줌의 신앙을 절대화하는 종교인들이 자신의 교의를 배반하고 있다.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야 할 지성인들이 그 권리를 어두운 술집에서 오용한다. 법을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법조인이야말로 이 사회의 배신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를 경고하고 비판해야 할 주류 언론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 경보와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한 줌의 사익 집단들이 과잉대표되고 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목소리는 가려져 들리지 않는다. 나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는 과잉 대표된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몫과 일상에 충실한, 그러나 가려진 이들 덕택이다. 그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노예라고 말한다. 노예적 삶을 벗어나기 위해 나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언론과 법조계, 지성인 집단에서 울리는 작은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작은 너의 소리를 듣자. 그를 위해 언론과 법조계를 개혁하고 교육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그 소리는 사적 이해와 욕망을 넘어 공동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욕망에 잠긴 목소리는 노예의 말이다. 물적 욕망을 넘어서는, 의미를 향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 때 변화가 가능하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