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코로나19 창궐 이후 첫 명절의 키워드는 언택트, 비대면이었다. 연휴를 앞두고 전국 각지의 '고향'에서는 자식들의 귀향을 만류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의 호소가 동영상과 현수막으로 넘쳐났다. 언론들은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돌면 차례를 금했다는 문헌과 고증을 찾아내 '비대면 추석' 분위기를 잡았다. 정부는 추석 대이동이 코로나19 대유행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연일 쏟아낸 것도 모자라 명절 연휴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도 폐지했다. 국립현충원을 비롯해 전국의 공·사립 추모공원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발 없는 말(言)도 천리를 간다는데, 발 달린 사람들의 이동 욕구를 막을 도리가 없다. 연휴 기간 고속도로 1일 통행량은 지난해보다 15% 정도 줄었다지만, 연휴가 길어 전체 통행량은 비슷했다고 한다. 제주도와 부산에 관광객이, 설악산엔 등반객이, 서해엔 낚시객이 몰렸다. "코로나가 하루 이틀에 없어질 것도 아니고…. 만날 집만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외교부 장관 낭군님의 미국행은 코로나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여준다. 차벽으로 봉쇄한 개천절 광화문 '재인산성'은 어색하고 기괴했다.
연휴의 이완감 때문인가. 정치의 시간도 한가해졌다. 연휴 직전 면죄부를 받은 추미애 법무장관은 '무책임한 세력들에 대한 후속조치'를 예고하고, 야당은 '추안무치'로 받아쳤지만 연휴 덕분에 전쟁으로 번지진 않았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트럼프는 렘데시비르를 투약받고 대선 유세를 중단했다. 우리 해군은 명절 내내 서해 북방한계선 아래에서 북한 해군에 사살된 공무원의 시신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연휴 중에 숙성된 정쟁과 국제정세 변화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비대면 추석에 집에 갇힌 국민들은 다양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TV 채널을 전전했다. 트로트와 특선영화, 스포츠를 오가던 중에 그나마 '나훈아'가 위로가 됐다. 무관중 비대면의 한계를 역대급 퍼포먼스와 레퍼토리로 극복한 공연은 나훈아 이름 석자에 담긴 무게를 증명했다.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며 나라를 지킨 건 "바로 국민 여러분"이라는 메시지는 커다란 여운을 남겼다. 나훈아만 기억나는 2020년 비대면 추석, 내년부터는 다시 없길 바란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