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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먹방 콘텐츠를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라면 요리가 수두룩하다. 문어나 대게 한 마리를 통째로 넣은 라면은 해안 도시 맛집들의 단골메뉴가 됐고, 먹방 유튜버들은 라면에 초호화 식재료를 더한 새로운 메뉴들을 쏟아내고 있다. 영화 '기생충'으로 유행했던 '한우 채끝살 짜파구리' 열풍도 시들해졌을 만큼, 라면 요리의 무한 변신은 발빠르고 호화롭다.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1위이다. 남녀노소 없이 라면을 끼니로 먹는 것도 모자라 야식의 대명사로 만들어 놓았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건넨 "라면 먹을래요"라는 대사는 단순한 식품을 넘어선 라면의 문화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바야흐로 한국인은 라면으로 미각의 평등을 이룬 시대에 사는 듯 싶다.

하지만 한국인의 집단심리 한구석엔 라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숨어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라면의 미덕은 싼 가격, 간편한 조리, 신속한 섭취다. 어쩐지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돈과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의 식품이라는 인상이다. 실제로 그랬다. 삼양라면이 처음 출시된 1963년은 산업화가 막 시작된 시기다. 서민들은 라면으로 간단하게 때우고 신속하게 일터로 복귀했고, 빈곤층에겐 라면이 구황식품이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지만, 5천년 역사에 밥심이 제대로 느낀 시대는 드물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에게 '밥심' 못지 않은 '(라)면심'이 있었다.

'라면=빈곤'이라는 인식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86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다. 스타탄생 스토리의 클라이맥스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라는 언론 보도였다. 그녀가 한 말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었다. 가난했지만 17년 동안 라면만 먹고 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면 소녀'라는 낙인은 아시안 게임 육상 3관왕을 대신해 지금껏 회자된다.

엄마 없는 집에서 라면을 끓이다가 불이 나 중상을 입은 인천 초등학생 형제들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뉴스가 고맙고 반갑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형제를 지칭하는 '라면 형제', '라면화재 형제'라는 뉴스 제목들이 마음에 걸린다. '라면'에서 빈곤, 결손, 학대의 냄새가 물씬하다. 의식을 회복한 형제들에겐 '라면 형제'로 각인된 현실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임춘애처럼 가해가 오래 갈 수 있다. 언론의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