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18명 수시합격자 알려지자
특혜 의혹·MB때부터 전형 갑론을박
맹자 서로 이익만 추구땐 나라 위태
중요한 것은 '仁義' 기득권 버려야
586정치인 이익정당화 논리 정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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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외교부 장관의 남편이 요트 구입과 외유를 목적으로 출국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민들에게 해외여행 자제 권고가 내려진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개인의 자유는 존중해야 한다는 옹호 논리도 있고, 거대야당 출신 민경욱 전 국회의원도 출국하지 않았느냐는 도긴개긴의 대응도 펼쳐졌다. 며칠 뒤에는 문재인 정부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자녀 18명이 수시모집을 통하여 연세대에 입학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민주화운동 관련 사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수시전형에 포함되었고, 당시 연세대 법인의 이사장이 조선일보 회장 출신 방우영이었던 만큼, 586자녀 특혜 운운은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제출되었다.

갑론을박이 어지러워 '맹자'를 뽑아들었다.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오셨으니 틀림없이 이롭게 해 줄 일이 있겠지요?" 이익을 바라는 양혜왕의 물음으로 '맹자'는 시작된다. 맹자는 왕의 기대를 단호하게 잘라 버린다.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인의(仁義)일 따름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임금은 무엇으로 나라를 이롭게 해 주겠는가를 묻고, 대부(大夫)들은 무엇으로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해주겠는가를 물으며, 사(士)와 서민들은 무엇으로 나를 이롭게 해 주겠는가고 묻는다면,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

돌이켜 보건대 IMF를 경과하면서 한국 사회의 현실은 엄청나게 변모하였다.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따위 신조어가 등장하더니 살벌한 경쟁을 통한 살아남기는 우리 사회의 일상 질서가 되고 말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삶을 가늠하는 방식이 IMF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로부터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의 방향으로 두드러지게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그즈음 신용카드 광고에 등장하여 일상 덕담으로 확장되어 유행하였던 문구는 퍽 상징적이라 할 만하다. 기실 최근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공정성 논란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공정성 추궁은 결국 성공을 위한 규칙 및 그 적용의 불편부당함을 따지는 행위인 까닭이다. 결승선만 바라보며 앞으로 질주하는 눈 가린 경주마인 양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삶을 견디어 내고 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이익을 좇는 나라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주변의 설레발과 상관없이 거듭 사과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처신은 적절하다. 도긴개긴의 대응은 이 나라를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데 머무를 따름이다. 책임 있는 관료·정치가라면 그 바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자녀에게 주어진 특혜 또한 마찬가지다. 움켜쥔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586정치인들에게 따라붙고 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자 자녀에게 주어진 입시 특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황이다. 후자의 사실은 응당 전자의 맥락 가운데서 읽힐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 방우영 조선일보사 전 회장을 소환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 정리해야 할 내용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학벌을 통한 계급 재생산에 무임승차한다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나려면 586정치인들은 정치 논리 바깥에서 정리해야 할 사항을 제대로 정리해 내어야 한다.

설령 민주화운동과 관련자 자녀에게 주어진 입시 특혜의 상관관계를 나름의 논리로 정리해 내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살아남기 위하여 도저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다른 편 입장에서 보자면, 어떠한 수준에서 논리가 마련되든 이는 자기들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만 이해될 따름이라는 것. 결국 위아래가 뒤엉켜 서로 이익을 다투는 모양새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말이 된다. 이런 판에서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사회적 약자는 부득이하게 공정을 집요하게 따질 수밖에 없을 터이니, 기득권을 쥔 부류에서 먼저 더 이상의 이익을 내려놓아야만 이로부터의 출구가 마련된다. 그러한 본보기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할 때 지금과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지난 시절의 치열했던 민주화운동이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까닭은 온전한 자기희생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훗날 더 큰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거리로 나섰던 대부분의 벗들도 그러하였을 게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