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불황시대에 임대료 할인 등
살다보면 작은일에 감동할 때가 있다
옛 혼사때 재물보다 가풍을 보듯이
한 집안의 내력은 후손들에 나침반
잘사는 것보다 잘 사는 걸 보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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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표 시인
살다보면 작은 일에 감동할 때가 있습니다. 수원의 먹자골목 인근에 소박한 쌈밥집이 있지요. 손님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연세 지긋한 주인장의 음식솜씨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20년이 넘도록 이 한곳에서 장사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하지만 경제가 나빠져 문을 닫는 곳이 많은데 여전한 걸 보면 특별한 비결이 있을 듯했습니다. 조심스레 물음표를 던졌는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지요.

"제 음식 솜씨가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건물주가 오랫동안 세를 올리지 않아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왔지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 들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그냥 놔두는 건물주가 있구나! 건물주가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데 오랫동안 세를 올리지 않아 다른 건물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나라를 구했는데, 후손은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것 같다"며 건물주를 자랑했습니다. 건물주를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어느 공직 선배가 기억납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렵고 외환위기 때보다도 힘들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얼마나 버거우십니까. 하지만 난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다음 달부터 임대료를 낮추겠으니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임대료를 동결하기도 쉽지 않은데 내려주다니, 새삼 그 선배가 존경스러웠습니다. 옛 어른들은 가진 게 적어도 나눌 줄 알았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스스로의 꿈이나 자존심까지 버려서는 안 되지요.

옛날에 혼사를 앞두고 상대 집안의 가풍을 살피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인물이 번듯해도 집안 내력이 시원찮으면 '그 나물에 그 밥' 취급했지요. 경주 최씨 집안 가훈이 회자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시집올 때 은비녀 이상의 패물을 갖고 오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들어올 것에 맞추어 쓰라. 파장 물건은 사지 말고 값을 깎지 말라.

부모의 생각과 발자취는 자식에게 나침반이자 길잡이가 되지요. 그러므로 솔선수범으로 가치 있는 삶의 철학을 실천해야 합니다.

듣기 좋은 말만 백번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百言不如一行)이 중요하지요. 소중한 자산은 재물이 아닙니다. 재물만 남겨주면 자식은 나태해지기 쉽고 서로 다투는 일을 흔히 보게 되지요.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어야 합니다.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르지요. 부자로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 합니다.

너른 고을 시골에서 태어난 저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웃을 도우며 양보하고 배려하며 사시던 아버지를 통해 돈보다 가치 있는 게 너무나 많다는 걸 배웠지요.

비록 가진 것이 모자라도 우리 형제들 역시 아버지처럼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내 삶의 보석 같은 자양분, 그것은 부모의 거름으로 가능했지요. 이를 바탕으로 가진 건 없었지만 부끄럽지 않게 늘 당당하고 위엄 있게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 불 안 가리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고관대작이 된 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요즘 시대에 가훈이나 가풍을 언급하면 구태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이 없이는 미래도 있을 수 없듯 어제 없는 오늘도 없습니다.

전통은 과거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정신적인 유산이지요. 가훈이나 가풍 역시 낡은 교훈이 아니라 미래를 잇는 소중한 가교일 수 있습니다.

/홍승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