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가축 살처분(殺處分)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트라우마 예방 및 치료 제도 개선을 정부에 권고했다. 인권위는 2017년 공무원과 수의사 268명을 대상으로 '가축 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 현황 실태'를 조사한 결과, 4명 중 3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또 4명 중 1명은 중증 우울증이 우려된다고 했다.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르면 국가·지자체는 가축 살처분 참여자로부터 신청을 받아 심리적, 정신적 치료비용을 지원할 수 있다. 인권위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사건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회피반응'을 보여 스스로 치료를 신청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과 11일, 강원도 화천의 축산농가 돼지들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해당 농가의 돼지 1천200여마리가 살처분됐다. '굴착기 굉음과 함께 새끼돼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굴착기 2대는 농장 구석에 구덩이를 파 돼지를 담을 대형 용기(FRP) 10개를 묻고 있었고, 1대는 돼지를 줄에 묶어 용기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방송이 전하는 끔찍한 현장 상황이다.
가축 살처분은 잔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죽을 까닭을 모르는 동물은 괴성을 지르며 살겠다고 발버둥 친다. 멀쩡한 생명줄을 끊고 무더기로 땅에 묻어야 하는 인간 역시 생지옥을 경험한다. 일부는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정신질환자가 되기도 한다.
1년 만에 재현한 악몽에 축산농가들은 망연자실한 표정들이다. 연천·포천·파주 지역 농가들은 얼마 전 재개한 새끼돼지 입식을 중단하게 됐다. ASF 바이러스는 겨울에도 내성이 강하다. 원치 않는 개점휴업이 언제 그칠지 기약도 없게 됐다.
인간계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돼지들에는 ASF 바이러스가 창궐해 인수(人獸) 협공을 하고 있다. 둘 다 뚜렷한 치료제도, 백신도 없다. 겨울철에 더 활성화하고 전파력도 강해지는 특성을 지녔다. 지난해 중국에서 1억마리, 국내에서 45만마리의 돼지가 희생됐다. 바이러스 전파자로 찍힌 야생멧돼지는 씨가 마를 지경이다. 아직은 잠잠한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가세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겨울을 맞을 수 있다. 생태계(生態系)의 이상기류가 심상치 않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