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검열 금지 풀어야 하는 불가코프
답장 받지 못한 편지 쓰기를 반복
기다리게 하는 것은 권력의 특권
편지 쌓여갈수록 영혼은 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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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후안 마요르가의 연극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손원정 연출, 10월8~18일, 스튜디오76)는 검열로 인해 소멸해가는 한 영혼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1891~1940)의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29년 불가코프는 자신의 작품이 공연 금지를 당하자 스탈린에게 편지를 쓴다. 이후 편지 쓰기를 반복하지만 답장을 받지는 못한다.

연극은 불가코프가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편지의 목적은 분명하다. 스탈린을 설득해야 한다.

검열 금지를 풀어야 하는 불가코프. 아내가 스탈린 역할을 한다. 스탈린 입장에서 불가코프의 편지를 읽는다. 편지를 수정한다. 편지를 쓰고 또 쓴다. 편지 쓰기의 시간은 쌓여가지만 스탈린에게서 답장이 오지는 않는다.

근대 매체에서 편지만큼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장치가 또 있었을까. 편지를 사이에 두고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누군가가 가로챈 편지,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그 편지가 제때 도착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을 만들게 된다.

가로챈 편지는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정보가 넘어감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는 답장을 받아야 할 사람의 시간 그 자체가 사건이 된다.

스탈린에게 보내는 불가코프의 편지는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에 가깝다. 스탈린의 답장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코프가 반복하는 편지 쓰기는 강박으로 치닫는다. 편지가 잘 도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불가코프는 이제 멈출 수도 없다. 편지 내용에 무슨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편지를 다시 쓴다. 쓴 편지를 다시 읽고 수정한다. 그 반복하는 시간에 쌓여가는 것은 편지만이 아니다. 강박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스탈린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화가 왔던 것이다. 스탈린과의 통화 중에 끊긴 전화로 인해 불가코프는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다.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은 편지쓰기의 시간으로 연장된다. 전화는 편지만큼 기다림의 시간을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 장치인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기다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 수도(통화 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연극에서 전화와 편지 장치를 통해 보여주는 기다림의 시간은 마치 롤랑 바르트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후안 마요르가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무대에 형상화한 작품이 또 있을까.

스탈린에게 쓰는 불가코프의 편지가 탁자 위에 쌓여가는 과정은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롤랑 바르트)이라는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 답장 없는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갈수록 불가코프의 영혼은 침식한다.

불가코프의 일화에 판타지 형식을 가미한 후안 마요르가의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는 검열과 금지가 한 예술가를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검열과 금지가 가진 폭력은 단지 외부의 물리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 폭력이 진정으로 강력한 순간은 물리적 폭력에 앞서 자기 검열을 작동하게 할 때이다. 그 과정에서 영혼은 잠식당한다.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가 탁자 위에 쌓여가는 만큼 그의 영혼은 소멸해간다. 그 소멸이 진행하는 동안에도 "원고는 불타지 않아요"라며 희곡을 집필해 보지만 시간은 더 이상 그의 편에 속하지 않는다.

이제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가 만들어낸 환각의 인물이다. 그렇게 영혼은 불타서 재가 되고 말았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