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신화 같은 대이변 기대하는것 비정상
암울한 현실 영웅환상 기대 '비극의 맹아'
퇴행적 심리이용 또한 '몰역사적 기만행위'
신화는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실은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 고려의 건국영웅신화는 왕건의 선조 6대들의 내력과 자취를 다루고 있는데 대부분 기존의 전래 설화들을 개작한 것이다. 2대조인 작제건 신화의 핵심모티브는 괴물퇴치담, 용녀혼인담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이야기는 인천 백령도 배경의 거타지 설화를 주인공만 작제건으로 바꾼 이야기이다. 조선의 건국신화에 해당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시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찬양하기 위해 세종의 여섯 할아버지들의 행적을 중국의 고공단보를 비롯한 건국 영웅들의 고사와 비교하여 찬양하는 서사시이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최초의 책이라는 언어학적 의의가 크고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주제의식, 비유와 상징과 같은 문학적 구성요소는 주목할만하나 신성성이나 경이감을 주는 이야기로 회자되지는 않는다.
신화는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혹은 신비로운 자연현상이나 환경을 초월적 존재에 의거하여 설명하려는 고대인의 상상력이 낳은 담론체계이지만, 과학기술이 진보한 근대에서도 '신화적' 이야기는 만들어지며 또 '신봉'되기도 한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은 병자호란 때의 실존 인물이지만 청나라를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식량이 떨어지자 가시나무 어살(漁箭)로 조기를 잡는 기적으로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의 어민들에게는 조기잡이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어살은 임경업 장군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실은 가장 오래된 전통 어로방법이다. 그리고 임경업은 친명반청(親明反淸)의 보수적 명분론에서 보면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나 당시의 국제정세나 역사의 흐름에는 어두운 군인에 불과했다. 멸망 직전의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겠다는 임경업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구상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모한 명분론으로 평가된다.
민간신앙의 경우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일반인들의 연민도 작용한다. 바리데기 공주나 최영 장군과 같은 무속의 신격들이 그렇다. 또 일반인들의 영웅 대망론에 기댄 사이비 신화도 만들어진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신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압과 노동자와 국민의 희생으로 이룬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신화처럼 유통되고 있다.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는 배경도 실은 박정희 신화 위에 지어진 신기루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는 박정희 신화와 재벌 기업 현대 신화를 환기함으로써 영웅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들의 '신화적' 이야기는 참혹한 실패담으로 전락하고 그 '영웅'들은 지금 감옥에 있다.
신화를 뜻하는 '미스(myth)'란 말은 그리스어 '뮈토스(mythos)'에서 유래했다. '뮈토스'는 논리적 언어인 로고스(logos)와 대립되는 말로서 신성하고 감성적인 담화라는 의미이다. 논리와 이성 앞에서 신화는 퇴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현대의 영웅서사들은 대부분 임경업 장군의 신격화에서처럼 실제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실을 제거해버린 것(privation d'Histoire)이다. 노력이나 투자는 하지 않고 대박이나 일확천금을 바라는 심리를 경계해야 하듯이 영웅신화와 같은 신이한 대이변을 기대한다는 것 또한 비정상적인 사회심리이다. 암울한 현실 때문에 영웅을 환상하고 그 출현을 기대하는 대중심리는 비극의 맹아이며, 그런 퇴행적 심리를 이용한 행위 또한 몰역사적인 기만행위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