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베푼 관리에 감사의 마음 기려
碑를 건립하거나 기념행사로 승화
그러나 일제 이토히로부미 사례처럼
권력욕·처세를 위한 '가짜'도 많아
국민에 오래 기억될 리더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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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화 교동도에 가면 오랜 역사를 지닌 향교가 있다. 오래전에 배를 타고 답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허물어진 읍성 밖 밭 한가운데 수십여 개의 송덕비(頌德碑)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사학과 교수님께 물었다. 저런 위대한 송덕비가 왜 홀대를 받느냐고.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고 떠난 관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부임하자마자 송덕비부터 만든 탐관오리들도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자마자 송덕비가 읍성 밖으로 버려진 이유이다. 그런데도 최근 가짜 송덕비까지 향교 입구에 가지런히 모셨다. 가짜와 진짜를 생각해보라는 향교 어르신들의 역사적 안목이 담겨있다.

남산포에는 조선시대 수군 통제사령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배를 정박시켰던 묘박은 여전히 담벼락 옆 쓰레기에 갇혀있다. 교동향교의 전교(典校)를 지내셨던 분이 인천시나 정부에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하다. 남산포를 기억하지 않는 우리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가 불망비(不忘碑)로 안내했다. 민낯으로 서 있는 송덕비와 달리 불망비는 비각까지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정3품인 도정(都正)을 지낸 분이다. 주민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불망비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사후에 세웠다는 그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이 인간의 도리를 다한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었기를 바랐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혼자만 그리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으로 그리워한다. 집단적인 추모는 역사나 기념행사로 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불망비가 항상 좋은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자 이토의 공을 잊지 않기 위한 불망비를 세우고자 송덕비건립사무소를 설치한 자들이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의 거사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1월 2일이었다. 111년 전 오늘의 역사를 보면서 인간의 권력욕과 처세술 그리고 탐욕스러운 사악함에 놀랄 따름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이토의 송덕비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지금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특정한 강대국가들의 편을 들어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이나 정치인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민주화 경력을 내세워 금배지를 달았을까. 낙하산으로 한자리를 얻었을까. 자식을 민주화 유공자로 입학시켰을까. 아마도 그 친구라면 모든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대의를 행한 것처럼 그 친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특권적 지위가 지금도 정치나 일부 영역에서는 온존되고 있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이 참여했다. 차이가 있다면 방식과 행동 그리고 법적 책임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민주화의 성과를 공유하기보다는 더 큰 개인적 지위와 권력을 탐내는데 활용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도 실업으로 인생을 시작하는 대학생들, 명퇴로 인해 자영업으로 내몰린 시민들이 보이는지.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당당하게 내걸었던 정신은 지키고 있는지. 묻고 있다.

현재 국무총리, 장·차관급 14명, 국회의원 10명, 연고 국회의원 36명이라는 전북. 그들에 대한 촌평이 가슴에 와닿는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개인의 성공일 뿐 전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거기에는 연고주의나 탕평책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의 등용과 획기적인 정책집행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가 담겨있다. 가상화폐를 형벌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도 현 정부의 장관이었다. 세계 최대 전자결제업체인 페이팔(Paypal)의 암호화폐 지원소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부동산이나 주식을 징세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텔레그램 망명과 넷플릭스 선호처럼 외국으로 거점을 옮기는 '주식 망명'은 필연적이다.

타인을 억누르고 업적을 자칭하면서 송덕을 바라는 정치인의 시대는 지나갔다. 제4차 산업혁명의 역동성을 펼치면서도 국민의 삶을 존중하는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국민의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지혜롭고 결단력이 있는 불망의 지도자를 찾는 이유이다.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