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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살았다. 이란 팔레비 왕조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추방당했다며 난민 인정을 받아 영국에 정착하려다가 여권을 분실하는 바람에 출발지인 프랑스로 쫓겨나, 그대로 공항 라운지에 갇힌 것이다. 공항 칩거가 흡족했던지 나세리는 프랑스가 발급한 난민용 여권도 거부하며 공항생활을 이어갔다.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그를 공항 직원들은 가족처럼 돌봤고, 신문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일상으로 그는 일약 프랑스 제1국제공항의 명사가 됐다.

2004년 나세리의 일기를 엮어 출판한 '터미널 맨(The Terminal Man)'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The Terminal)'이다. 가상의 국가 크라코지아에 온 빅터 나보스키가, 모국에서 발생한 쿠데타로 인해 무국적자가 돼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갇힌 뒤 벌어지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하지만 나세리나 영화속 나보스키 처럼 행복한 난민은 극히 드물다. 많은 국가들이 UN 난민조약에 따라 난민을 보호한다지만 허울뿐일 경우가 많다. 중국은 홍콩 민주화운동가나 반정부 인사들의 미국 망명을 결사적으로 막는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목선 탈북난민 2명을 5일만에 북한에 강제송환했다. 유럽과 미국은 경제난민의 대규모 유입을 막는다. 외교분쟁과 국내 반대여론 등 정치적 부담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난민지위 인정에 각박한 것이다. 인권과 국익의 충돌이다.

그러니 실제로 난민이 되어 타국의 공항에 갇힌다면 처참하다. 지난 2018년 콩고 출신 앙골라 국적인 루렌도 부부와 자녀 6명이 인천국제공항에서 난민신청을 했지만, 심사를 거부당해 9개월 넘게 공항에 갇혔었다. 결국 법원의 결정으로 심사가 가능해져 공항을 빠져나왔지만, 가족 모두 건강을 크게 상했다고 한다. 언제 추방당할 지 모르는 공항 생활은 공포 자체였을 것이다.

루렌도 가족 사태로 난민법 위헌소원이 제기됐었다. 난민 심사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위헌이라는 주장에, 헌법재판소는 지난 29일 합헌이라 했다. 무조건 난민 심사를 허용하면 국경을 지키기 어렵다는 당국의 호소가 먹힌 것으로 보인다. 굳이 낯선 타국의 보호를 요청할 필요 없는 모국의 존재만큼 신성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