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석학 조지프 나이는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2015년)'에서 "미국의 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쟁국인 중국의 경제·군사력이 미국에 못미치고, 국제 리더로 인정받을 소프트파워가 빈약하다는 이유에서다. 즉 중국의 중화주의가 '중국의 세기'를 막고 '미국의 세기'를 연장시킬 것이란 통찰이다. 동북공정, 사드보복, 방탄소년단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억지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일만한 논리다.
하지만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로 조지프 나이의 전망이 무색해졌다. 미국의 자랑이던 민주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혼란에 세계의 조롱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8일(미국 시간 7일) 조 바이든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됐지만, 미국 대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널드 트럼프가 주인공이다. 그는 백악관에서 선거불복 진지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기이한 대통령이다. 부동산 재벌이자 리얼리티쇼 진행자로 악명을 떨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사건이었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백인 중산층들이 '미국 우선주의'에 집결한 덕분이다. 그의 통치는 분열적이었다. 트럼프 그룹의 총수처럼 나라를 통치했다. SNS로 지지층과 직접 소통했고, 존경받는 공화당원 매케인이 싫은 소리를 하자 '패배자'라 비난했다. 최고 존엄 김정은도 하노이에서 망신당했다. 이번 대선은 트럼프 찬·반 투표가 되고, 승복의 문화는 망가졌다.
물론 트럼프의 불복투쟁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선 측근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백악관이 텅 비었다. 공화당 의원들의 승복 요구는 미국 정당의 이성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미국 언론도 살아있다.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방송사들은 트럼프의 불법선거 기자회견을 중단하거나 팩트체크를 통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군중은 흥분하고 있지만, 정치와 언론은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로 인해 미국 민주주의가 검증대에 오른 건 틀림없다. 중국과 이란의 조롱거리가 된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트럼프 증후군인지 구조적 문제인지를 놓고 미국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미국 민주주의도 단 한 명의 지도자가 절단낼 수 있다는 사례로, 트럼프는 두고두고 연구대상으로 남을 듯하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