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매화 매개로 사랑 나눈 두 사람
퇴계, 풍기군수 자리로 가게 되자
밤 깊도록 침묵속 이별주만 나눠
두향은 말없이 떨며 붓만 적시고
둘은 그 밤이 영원한 이별이었다
퇴계는 오랫동안 고시 낭인의 생활을 거친 후 34세가 된 1534년 과거시험 문과 초시에서 2등으로 급제했다. 43세까지 종3품 성균관 대사성까지 올랐지만 정치적 파당과 정쟁에 휘말리면서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귀경을 반복하게 된다. 집권세력의 전횡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병을 핑계로 경상도 예안 지방으로 낙향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었다.
퇴계는 21세에 허씨부인과 결혼했지만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사별한 뒤 3년째가 되던 해, 예안에 귀양 와 있던 권질이 그를 불러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여식이 있는데,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맡아줄 사람이 없네'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퇴계는 정신질환이 있는 권질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권씨부인은 퇴계가 47세 때 아이를 낳다 죽는다.
그는 1548년 외직인 단양군수로 부임한다.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 정월이었다. 연회에서 관기 두향을 만난다. 두향은 시서와 거문고에 능했고 매화를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시와 매화가 대화에 올랐다. 퇴계도 매화를 몹시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에게 매화를 읊은 시가 여러 편인 것은 그 때문이다. 퇴계는 대학자이면서 시문에 능한 시인이었다.
퇴계는 자신의 매화 시편을 두향에게 읊어주었다. '뜰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매화 언저리 몇 번이나 돌았던고/밤 깊도록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꽃향기 옷 가득 스미고 그림자 몸에 가득하네'. 그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그뿐이었다. 퇴계에게는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한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더구나 둘째 아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 퇴계는 시름 깊은 밤을 보내고 있었다.
슬픔과 비탄과 상심으로 홀로 시를 쓰고 글을 읽는 퇴계를 두향은 사모하게 되었다. 두향은 정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퇴계에게 보냈으나 매번 물리쳤다. 그녀는 매화를 좋아하는 퇴계를 위해 여러 지방에 수소문해서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백매화를 구해서 보냈다. 귀하다는 백매화를 받은 퇴계는 '매화야 못 받을 것 없지'하며 동헌 뜰에 심고 정성껏 가꾸고 즐겼다.
그 일이 있은 후 퇴계는 두향의 재능을 가상히 여겨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매화를 매개로 두 사람의 정은 깊어지고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길지 않았다. 단양군수 재직 9개월 만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은 두향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뜨거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향에게 이별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고 충격이었다. 두 사람은 이별주를 앞에 놓고 밤이 깊도록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무겁고 긴 침묵이었다. 만 가지 감정이 복받치는 침묵이기도 했다.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아 떨리는 붓을 적셨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한 동안 두향의 어깨가 출렁였다. 퇴계는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안았다. 그 밤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가 7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신 왕래가 있어 1552년에 퇴계가 보낸 시를 두향은 거문고 가락에 실어 그리움을 달랬다.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마주하고/빈 방 안에 초연히 앉았노라/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거문고 줄 끊겼다 한탄하지 않으리'. 두향은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고 퇴계와 자주 찾았던 강선대에 초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했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