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를 엮다' 는 13년 넘게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다
만든 순간 낡아 가는데 왜 일생을
그래도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 흔적
남겨야… 결국 사라지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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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배를 엮다'(강현주 연출, 11월 5~8일, 여행자극장)는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도록 이끈 힘은 과연 무엇일까. 사전인가, 아니면 사전을 만드는 사람인가.

사전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형식이 적합할까. 이야기를 장악할 수 있는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전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좀 다를 수 있다. 소설, 영화 그리고 연극은 그 장르의 형식에 최적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특히 연극의 경우에는 그 13년의 시간을 한정된 무대의 시간으로 어떻게 압축할 것인지가 힘겨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시간과 싸우는 과정이다. 단어를 찾고, 용례를 모으고, 그렇게 쌓인 말 가운데 실을 것과 버릴 것을 고르고, 표제어로 선정한 말의 뜻을 풀이해야 한다. 출판까지의 작업은 지난한 반복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그 지루한 반복의 시간을 연극 무대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나름의 장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권투 영화라고 해서 권투 장면만 내내 보여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화 '록키'에서 권투 장면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마찬가지이다.

연극 '배를 엮다'는 그 13년의 시간을 두 번 생략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한 번은 12년 후, 다른 한 번은 1년 6개월 후.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작한 시간에서 12년을 건너뛰고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다시 1년 6개월을 건너뛰는 생략의 방식을 택했다. 그 방식이 최선이었는가를 묻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략과 휴지의 시간이 과연 사전은 무엇일까, 사전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물음으로 이끌도록 했다.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에는 사전 편찬자인 야마다 다다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나온다. 연애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 부분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 야마다 다다오는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에서 개성이 넘치는 풀이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백도를 "과즙이 많고 맛있다"로, 범인(凡人)을 "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공명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다른 것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 가정 제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 서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로 풀이했다.

사사키 겐이치가 쓴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야마다 다다오와 함께 겐보 히데토시를 다루고 있다. 사사키 겐이치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전에 삼켜진 삶을 살았다. 광대한 말의 사막에서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 사라지고 마는 말에 평생을 사로잡혔다. 145만개의 용례 카드를 수집한 겐보와 개성 넘치는 뜻풀이의 야마다에게 과연 사전은 무엇이었을까.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바람에 의해 모래 표면에 생기는 모양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문(風紋)"과도 같은 사전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몰두한 사람에게 사전은 무엇일까.

말의 바다라는 표현에서처럼, 흔히 말은 광대한 바다로 비유된다. '배를 엮다'라는 제목도 말의 바다에서 온 것이다. 사전을 엮는 과정을 배를 엮는 과정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엮은 배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낡아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생을 바치는 사람에게 과연 사전은 무엇일까. 연극이 끝날 무렵 도달한 곳은 다음 문장이다. "말은 흔적이죠.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그래서 어딘가엔 분명 남겨야 합니다. 결국 사라지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혹시 사전의 마지막 말이 궁금하지 않은가. 그 많은 사전의 마지막 말이 모두 같을까. 당신의 사전은 마지막에 어떤 말을 엮어 놓았을까.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