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준으로 봐도 어른이라는데
왜 나 자신은 아직도 낯선 것일까
잘 모르는게 많고 판단도 아리송
미운사람 더 밉고 화가 더 많아져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
'○린이'는 쓰지 않아야 할 단어이고 불편한 표현이지만, 어쩌면 이 신조어의 유행은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어른으로서의 무게가 버거운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나는 '○린이'니까 특정 영역은 몰라도 되고, 그러니까 알려달라고 사뭇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관대한 해석과 함께 고 허수경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시장에 가서도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몰라도 되는 그런 시절. 어린이는 그저 사람들을 구경하고 시장의 풍경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기만 하면 되니까….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느끼던 스무살은 졸업 후 어른이 아니라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얼떨떨했던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처음 생각했던 건 차를 사고 내 차에 앉아서 운전했던 날이었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차를 느끼면서 혼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쳐 먼 곳으로 왕복해 다녀왔을 때, 뭔가 하나의 큰 산을 넘은 것 같았다. 드디어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아서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던 그날의 긴장과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와 또 다른, 어엿한 한 사람의 어른이 된 느낌에 신나면서도 이상했던 기분이었지만 그런 작은 성취를 마음껏 자랑해도 될 나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결혼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자, 이제 어른인 걸까" 싶었는데 여전히 어른이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이로도, 서류상으로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 어떤 기준으로 봐도 나는 이제 어른이라는데, 왜 나 자신은 아직도 내가 어른이라는 것이 낯선 것일까? 어른이 되면 더 나아지는 줄 알았고, 뭐든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아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아리송하고, 미운 사람은 더 밉고, 관용과 용서보다 화가 더 많아진다. 모르는데 모른다고 할 수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니, 어른에도 단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던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일갈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그럽고 현명한 어른이란 정말 없는 것일까?
"비 오던 어느 날에/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마셨어/ 어머나,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어른이 된 것 같잖아/ 그 후로 이제 나는 빈 잔 하나로/ 쓰린 술도 마실 수 있고/ 짧지 않은 여행도 가방 한 개면/ 충분하게 되었어/ 한 벌의 외투로도 몇 년쯤은/ 불편 없이 잘 지내고/ 내 이름 석 자도 분명 말하고./ 먼 곳도 혼자 잘 가고/ 어른이 되려면은 영화 몇 편쯤/ 찍는 건 줄 알았었는데/ 시간은 결코 멈추지를 않더니/ 나도 어른이라고 불리네/ 정말로 나는 어른이 된 건가." 퇴근길에 접한 노래 한 곡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정밀아의 신규 앨범 '청파소타나'에 수록된 노래 '어른'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쓰여진 노래 가사와 담담한 멜로디를 듣고 있자니 정말로 나는 어른이 된 건가 싶으면서도 쓸쓸해진다.
정밀아의 노래처럼 "진짜 이렇게 살면 되나" 싶어지는 요즘, "마음이 이리저리 구르는 밤, 기분이 좀 신기한 밤"에 한 글자씩 글을 써본다. "괜찮은 것 같기는 하여서 그냥 이대로 살아갈 마음"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노래 속 주인공처럼 나도 '손바닥만 한 부침개 하나 부쳐먹으며' 노래를 듣는 것으로, 아직 서투른 어른의 저녁을 계획해본다.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