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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는 지난 6월부터 국민방위군을 재조명하는 보도를 이어가는 중이다. 한 국민방위군의 일기를 입수한 것이 발단이 됐다. 고 유정수(1925~2010)씨가 남긴 일기다. 1950년 12월23일부터 다음해 3월10일 사이에 작성된 76편의 일기는, 60만 국민방위군이 감내한 죽음의 행진을 담은 76장의 다큐멘터리 슬라이드 필름과 같았다.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남한 점령지에서 수십만 청장년을 의용군으로 징발했다. 의용군은 전쟁터의 총알받이나 각종 부역에 동원됐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어야 할 형편이 되자, 청장년 소개(疏開) 작전을 펼친다. 북한이 이들을 전쟁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국민방위군 창설과 소집명령의 배경이다. 국민방위군 대다수가 삼남(충청, 경상, 전라도) 이북의 서울·경기지역 청장년들이었다.

60만명이 넘는 국민방위군은 사령부 장교들의 인솔에 따라 경상도에 산재한 교육대로 일제히 출발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을 소집한 나라의 관리들이 이들을 먹이고 입힐 예산을 몽땅 횡령했다. 남으로 향하는 이들의 행렬은 순식간에 죽음의 행진으로 돌변했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집계 조차 안 됐다.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으로 추산될 뿐이다. 1951년 3월 국민방위군이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 단 4개월여만에 벌어진 참상이다.

1951년 국민방위군 예산을 폭식한 군 간부 일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은 없었다. 국방예산 비리 사건으로 일단락한 채 국가의 명령으로 자행된 '죽음의 기록'은 묻힌 채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피해의 증언은 넘쳤지만, 피해자의 진술과 기록은 없었던 탓이다. '유정수 일기'가, 거시 역사를 드러낸 미시사의 걸작으로 손색없는 이유다.

경인일보가 유씨 일기를 공개한 이후 국민방위군 관련 저서와 증언, 기록들이 속속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지난 5월 '2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시작됐다. 2010년 해산한 1차 위원회는 기록의 희소성을 이유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번엔 제대로 정리된 역사적 평가를 남겨야 한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들에게 이 기록을 드리노라." '유정수 일기'의 첫 문장이다. 가족에게 남긴 진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맞다.

/윤인수 논설실장